7 장 의와 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배부를 것임이요” 참된 평화의 길은 오직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살피는 대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 복 역시 앞의 복들을 논리적으로 뒤따르고 있다. 이 복은 다른 복들의 논리적 결론이며 우리 모두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다른 복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살피고 검토하게 하지만, 여기서는 그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무서운 자아의 문제, 즉 자기관심, 자기이익, 우리를 비참한 데로 인도하는 자기의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은 자아에 의지하여 자아를 신격화시키며 궁극적으로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방향전환을 하여 해결책, 곧, 자아로부터 구원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불행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질서와 삶의 원칙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는 복음의 뚜렷한 선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우리는 복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과 복만을 욕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항상 놓쳐 버리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행복은 직접 구해야 할 것은 못된다. 행복이란 항상 다른 것을 구하는데서 결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구하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하다. 행복을 의 대신 취할 때는 행복은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과 복을 찾으면서 한평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참으로 행복하고 복되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막연하게 존경할만한 태도라든가 보편적인 도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는 칭의 일뿐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 궁극적으로 온갖 형태의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요, 죄를 제거하려는 욕구이다. 심령의 가난이 무엇이며 내부의 죄로 인한 애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간다. 지금까지 이 복들의 관점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인은 그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죄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의는 그 이상이다. 의는 죄를 지으려하는 욕망에서 해방되려는 갈망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성품의 본질을 오염시킨 실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자아와 온갖 형태의 자아의 무서운 표현에서 해방되고자 갈망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적극적으로 성결해지기를 소원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매일의 생활에서 팔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의는 인생의 최고 욕망이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빛 가운데서 동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최고의 갈망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견해는 바울이 ‘분토’로 여긴 것이다.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는 모든 형태의 자기 신뢰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절실한 궁핍의식을 의미하며 고통스러울 정도의 심각한 궁핍의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주림은 그것이 만족하기까지 계속되는 깊고 심오한 것이다. 영적 주림과 목마름은 실제의 육체적 주림과 목마름과 같다. 그것은 고통과 고뇌를 일으키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어떤 상태를 소원하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쉼이 없고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그는 꾸준히 애를 쓰며 그것에 대해 꿈을 꾸게 되며 그의 꿈은 삶을 지배하는 정열로 화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이것이다. 탕자가 주려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원하는 상태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절망상태가 되며, 주려 죽으며,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며, 궁극적인 도움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은 행복하고도 행복하며, 복이 있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 흘러 들어오는 지점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의로 채워지지 못할 것이며 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내가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 약속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사모한다면 여러분은 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일은 즉각 일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와 죄책의 장벽은 제거된다. 기독교인은 항상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서 죄의 세력과 죄의 오염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력과 오염에서 구원 받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것을 얻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과 함께 동행하심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내내 계속될 것이다.
마침내 이 약속은 영원 세계에서 완전히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 존전에 허물없이, 티 없이, 점과 주름 없이 서게 될 날이 오고 있다. 그때에는 완전한 몸으로 된 새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몸과 혼과 영이 절대 온전하여 온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될 완벽한 의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안다.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되어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온전해졌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뿐이다”(빌3:1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계속 주리고 목마르고 있음을 안다. 채워지고 그리고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욱 주리고 목마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복이다. 우리는 다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 우리 최고의 갈망은 여전히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이다’이다.
여러분은 채워졌는가?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 은혜롭고 영광스런 약속이다.
'성경도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3-16장, 원죄, 자범죄, 육체의 죽음, 죽음의 완성 (강의안) (0) | 2017.09.20 |
---|---|
[스크랩]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0-12장, 지성적 피조물의 특별 통치, 인간의 타락, 죄의 결과들 (강의안) (0) | 2017.09.20 |
[스크랩] 악한 시대를 능히 이겨내는 믿음이 있다/ 토마스 왓슨 (0) | 2017.09.20 |
[스크랩] 거듭남은 위대한 영적 변화이다 / 제임스 뷰케넌 (0) | 2017.09.20 |
[스크랩]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0) | 2017.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