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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11장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김영희 강의안)

강대식 2017. 10. 11. 17:06

  11 장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9)

 

-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이렇게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찰할 때 성경 전체에서 팔복만큼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의 교만을 꺾는 말씀은 없다 하겠다.

이 진술에서 하나님께 채움(배부름)을 받은 결과와 그 작용을 본다. 이 복이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심령과 긍휼이 여기는 것, 애통하는 것과 마음이 청결한 것이 서로 관계가 있고 온유와 화평케 하는 것에도 서로 일치점이 있다. 이것들 사이에 연결점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충족을 하나님께 바라며 기다린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주님은 전혀 새롭고 다른 나라를 세우고 계셨다. 자연인이 팔복을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태롭고 치명적인 것은 없다. 새 사람만이 이런 새 삶을 살 수 있다. 이 진술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큰 쇼크로 임하였으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오고 있는 메시야의 나라가 국가주의적, 물질주의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례 요한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요한마저도 이런 생각에 집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너희 견해는 전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이 복을 제시하시면서 이 원칙을 한 번 더 강조하셨다.

 

이 말씀보다 오늘 이 세대에 더 적절한 말씀은 없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이 세상과 이 세상 삶에 대한 말씀 중 본문보다 더 분명한 선언의 말씀은 없다. 이것은 고도의 신학적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이 습관처럼 자기는 신학에 조금도 흥미가 없으며 사도 바울을 철저히 싫어하며 신약의 서신들에는 관심이 없지만 산상설교에는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산상설교의 아름다운 윤리적 교훈, 신기한 도덕의 개선책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좋아한 까닭은 산상설교가 비신학적이며, 교리나 기타 쓸데없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복되는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신학과 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상에는 어째서 전쟁이 있는가?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이다. 신약 성경의 인론과 죄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대 세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어째서 실패하는 것 같은가? 그것은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그 대답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요, 교리적인 것이다. 20세기의 비극적인 어리석음은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데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는 과오다.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새 마음, 새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이 산상설교처럼 인도주의와 이상주의를 철저하게 정죄하는 것이 성경에도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인도주의자들은 산상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산상설교에서 교리를 빼 버림으로써 산상설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켰다. 산상설교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신약성경의 올바른 관점에서 현대 세계를 바라볼 때뿐이다. 여러분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 때문에 놀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놀라서는 안 된다. 유화책으로 전쟁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전쟁의 회피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먼저 수동적 의미에서 그가 평화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능동적 의미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잠자는 개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평화를 소원하며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 그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는 사실에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능동적으로,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두통거리를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 성품, 새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의미한다. 논리적 순서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뿐이다. 화평케 할 수 있기에 앞서 마음이 청결해져야 한다.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앞서 자아와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아를 전적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 중립이 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어야 쌍방을 화합 시킬 수 있다. 즉 화평케 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가져오는 결과에 비추어 만사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만사를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본다. 항상 싸움과 오해와 분쟁으로 유도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이며 이것은 화평자의 자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첫째, 그가 자아에 대해 전혀 새 견해를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았고, 자신의 검은 마음 때문에 애통하였고, 자신을 보고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면 여러분의 권리나 특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참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 하나는 바로 나는 나의 생래적 자아를 미워하는가라는 것이다.

둘째, 새 생활관을 가진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 견해를 가짐을 의미한다. 그들을 보며 저 가련한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희생물이며 지옥을 향하고 있다. 그들을 이렇게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셋째, 새 세계관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자기를 낮출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첫째,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혀와 입술을 억제해야 한다. 화평자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래적인 성품에 따라 말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국제 사회에는 너무 토론이 많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를 이루는 첫걸음 하나는 말하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데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1:19)

둘째, 어떤 상황에든지 그것을 항상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분쟁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직면할 때에는 말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그 상황을 받아들여 복음의 문맥에 비추어 이것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하고 물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화평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면 그에게 먹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를 불쌍히 여겨 기도해야 한다.

셋째, 그를 구해 줄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되어 자신을 낮추고, 사과하고, 친절하려 애쓰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선수를 써야 한다.

넷째,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화평을 보급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심 없이,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권위를 세우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뜻으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소유하시려 한다. 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13:20).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가장 영광스런 정의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점잖만을 빼시지 않으시고, 오셔서 화평을 이루셨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권리와 체면을 세우셨다면 온 인류는 지옥과 절대 파멸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 그가 어떻게 화평을 이루셨는가?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루셨다고 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며,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누리며, 서로 화평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는 둘을 하나로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2:14-15)

 

주님은 신성과 영원성의 특권을 주장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모양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자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위하여 그분이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여러분은 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품으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각각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남의 일도 돌보아 주시오 이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이 복되고 영광스런 진리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를 평화의 왕을 닮은 자와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신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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