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롬7:6) / 마틴 루터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은 덕스러운 삶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모든 가르침을 말한다.
은혜의 성령 없이 그런 것을 받아들여서 마음 깊이 새긴다면,
그것은 공허한 문자요 영혼을 죽이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영과 문자에 관하여> 4장에서 말했다.
“우리에게 절제 있고 덕스러운 삶을 영위하라고 명하는 가르침은 문자이다.
이 문자와 아울러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성령이 없다면, 그 문자는 사람을 죽인다.”
많은 것들을 읽고 많은 책을 쓴 아주 박식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식한 자들이 책을 통해서 가르치는 내용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는 자들이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만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서 사람들이 인간으로서는 아주 유식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아주 무식하게 되어 버린 우리시대를 경계해야 한다.
복음을 성령의 말씀, 영적인 가르침, 은혜의 말씀, 구약의 말씀이 예언한 것의 드러남, 감춰진 지혜 등등으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복음은 우리가 어디에서 그리고 어디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율법(구약 성경)이 약속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지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제시하고 나눠준다.
율법은 사람의 힘으로 지킬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좋은 소식 이외의
다른 그 무엇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로마서 주석』, p 14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 루터의 로마서 주석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사도는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사도는 얼마든지 원한다. 어거스틴,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진다는 것은 지금은 사망의 몸인 이 육신이 현세적인 죽음을 통해서 이 영적인 죽음을 그치게 됨으로써 생명의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 싸움도 끝이 난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는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기도는 분명하게 사도가 여기서 영적인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는 궁극적인 구속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영적이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5절에서 사도는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쓴다. 한 사람의 동일한 믿는 자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동시에 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사람이 이러한 이중적인 섬김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육적인(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도들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의 의가 그들을 덮고 그들에게 전가되어서 의롭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죄악된 정욕들을 지니고 있는 한에 있어서 죄인들이다. 그들은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는 병든 자들과 같다. 그들은 정말 병들어 있지만, 나을 소망이 있고 나아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건강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환자들이 자기는 다 나았다고 교만하게 주장하면 아주 심한 해를 겪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병이 재발되어 처음의 병보다 더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 전체에서 루터는 바울의 말들에 토대를 둔 열두 가지의 서로 다른 증거들을 통해서 사도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여전히 육적이고 변화 받지 못한 자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이고 변화 받았지만 자기 자신 속에서 벌어지는 새 사람에 대한 옛 사람의 전투를 애통해하는 자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5:17이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사도는 완전주의의 오류에 맞서 논증을 펼쳐나간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7).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짓된 철학에 속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세례나 회개를 통하여 죄는 완전히 멸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사도가 여기서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하는 것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변화 받은 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사도 안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죄도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따라서 사도는 여기서 육적인(또는 변화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 속에도 죄는 여전히 있는데, 이는 그가 은혜 안에서 행하고, 교만을 버리며, 오만을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로마서 주석』, pp 146-148
“율법이 --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8:3) / 마틴 루터
사도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했기 때문에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참된 사랑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할 수 있다. 믿음이 사람을 깨우치지 않고, 사랑이 사람을 자유케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선한 것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기 눈에 보기에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악한 일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기가 선하고, 존귀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알 뿐이고, 하나님과 남들이 보기에 선한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는 선만을 알고 행하려 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이루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본성의 빛을 높여서 은혜의 빛과 대등한 것으로 여기고자 하지만 헛된 일이다. 본성의 빛은 흑암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정반대이다.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위에 놓지 않는다. 모든 것들 속에서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원하며, 하나님만을 좇는다. 부패한 인간 본성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고 원하고 좇는다. 본성은 끼어드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 버린다. 시편104:4의 고집 세고 사악한 마음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율법은 사람에 의해 성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연약하였다. 율법은 율법이 하지 못한 것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영을 통해서만 강해진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믿음의 권능은 율법을 확증하고 굳게 세운다. 아우구스티누스, “율법은 자기가 명한 것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연약하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율법의 잘못이 아니라 육신, 즉 세상적인 소유들을 추구하여 율법의 의를 사랑하지 않고 현세적인 유익들만을 선호한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사랑에 의해 완전해지고 순종적으로 된 의지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일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그 의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뿐이다. 부패한 인간 본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곧 죄로 말미암아--육신에 죄를 정하사”. 자신의 육신에는 없었던 죄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짊어지신 그 공로를 통해서,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받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죄의 권능을 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확보하셨고, 육체의 지혜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셨다.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죄악된 정욕들을 미워하고 사랑을 좇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 『로마서 주석』, pp 15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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