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예정
구속이 일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고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은혜의 사역에서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정을 알려준다. 예정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딤후1:9,영원한 때 전부터—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는 하나님의 사역의 초기에서 역사했지만 실제적인 적용 이전까지는 예정된 자 안에 내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엡2:3,우리도—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고전6: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은혜의 적용 이전에는 예정은 예정된 자 안에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으며 오직 예정하는 자 안에만 감추어져 있다.
예정이란 인간들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 롬9:22,23,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을지라도. 목적을 위한 수단의 질서가 확고하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는 결정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께서 사물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기 전에 이러한 질서를 홀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결정이 아닌 예정이라고 불린다.
이는 확고한 뜻에 의해 실행되어질 명백한 선언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작정이라고 불린다. 동일한 의미에서 이는 목적과 뜻이라고 불린다. 예정은 최대의 지혜, 자유, 확고함, 불변성을 수반한다. 예정의 기초는 불변이며 해체될 수 없다. 딤후2:19,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이러한 기초에서 예정된 자의 수는 하나님의 예비의 확실성뿐만 아니라 그가 정한 수단들의 확실성에 의해서도 확고부동하다. 눅10:20,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정은 어떠한 원인, 이유, 혹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정하는 자의 의지로부터 유래한다. 마11: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롬9:16,18,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궁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러한 작정이 하나님의 심중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는 의지의 행위를 전제하며 예지라고 명명된다. 따라서 예지란 때때로 예정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덜 정확한 표현이다. 롬11:2,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하나님 안에서는 오직 단일한 의지 행동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는 동시적이며 선후 관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적과 수단에 대한 오직 한 번의 작정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의도에 관한 한 하나님이 수단 이전에 목적을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롬8:30,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먼저 수단을 의도하시고 그후 본 수단들을 목적으로 인도한다. 살후2:13,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심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두 종류의 예정 즉 선택과 거부 혹은 유기가 존재한다.
선택은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가 그들 안에서 나타나도록 예정하는 것이다. 엡1:4-6,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선택이란 하나님 안의 단 한 번의 단순한 의지행위이다. 신적 심중에 있는 의지의 행위들에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히 영생의 상속자들을 아신다는 의미에서 확고한 지식이 수반된다.
따라서 선택 자체는 지식 혹은 예지라고 명명된다,롬9:11. 이러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받을 자의 이름과 이들을 정한 선한 것들이 마치 책 안에 기록된 것처럼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책이라고 불린다. 시69:28, 계3:5,13:8.
유기란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안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예정하는 것이다, 롬9:22,멸하기고 준비된 진노의 그릇, 살후2: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 유4,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 유기는 첫 행위는 공의를 나타내기를 의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피조물의 파괴가 아니라 합당한 파멸 안에서 현현하는 신적 공의이다. 선택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은혜가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유기에서는 저주 자체가 목적이지만 선과는 관련이 없다.
다음에 유기는 이러한 공의가 현현되는 자들을 지명한다. 선택된 자들이 사랑에 의해 구원으로 정해졌다면 유기는 대상자들을 그 사랑으로부터 거부하고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유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로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택을 부정했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며 박탈적이다. 유기는 정의가 유기된 자 안에서 나타나도록 수단을 사용한다. 이러한 수단은 죄로의 허용이며 방임이다,롬9:18,살후2:11,12. 죄로의 허용은 형벌의 원인이 아니다. 이들의 원인은 죄 자체이다.
26 부르심
적용의 부분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연합에서 유래하는 유익들에의 참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로 이로써 인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모든 축복들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다. 요일5: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3:24,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부르심이란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여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벧전2:4,예수에게 나아와; 엡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연합이 따른다. 살전1:2,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게.
부르심은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부르심은 인간이 실제로 선택되는 첫 번째의 행위, 즉 선택이 인간에서 나타나고 시행되는 첫 번째 행위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성경에서는 종종 부르심과 선택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전1:26-28,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을 택하사— 약한 것을 택하사.
부르심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위엄, 정직, 근면 혹은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근거한다. 행2:47,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13:48,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롬8:30,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약1:18,그가---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제시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제시란 그리스도를 구원의 충족하고 필수적인 수단으로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외적 제시는 복음, 즉 그리스도의 약속들을 제안 혹은 설교하는 것이다. 내적 제시는 약속들이 내적인 말씀에 의해 인간의 심령에 전해지는 일종의 영적인 감화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제시된 그리스도가 인간과 연합하고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일어난다. 요6:56,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우리는 연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후5:17;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갈3:27;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신다,엡3:17; 그리스도의 집,히3:6; 그리스도의 성전,고후6:16; 그리스도와 결혼한다,엡5:23; 그리스도의 가지들,요15:5; 그리스도의 지체들,고전12:12;
이러한 영접으로 인해 부르심은 회심이라고 불린다,행26:20.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든 자들은 완전히 죄에서 은혜로 전환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 이는 또한 중생 혹은 새 생명의 시작, 새 창조,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인간에 있어서 영접은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다. 빌3:12,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의 수동적 영접이란 은혜의 영적인 원소가 인간의 의지 안에서 생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엡2:5,(하나님이) 우리를 --- 살리셨고. 이러한 은혜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근거가 된다. 요3: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의지의 회심이 전인의 회심에 있어서 효력적인 원리이다. 빌2:13,너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의지는 자유로운 행위자의 역할이 아니라 오직 순종하는 주체의 역할만 수행한다. 고후4:6,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능동적 영접이란 부르심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서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의뢰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이러한 신앙의 행위는 참으로 나타나게 되며 인간에 의해 자유롭고 그리고 확고하게 불변적으로 실행된다. 요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러한 신앙에서는 의지가 진정한 선을 소유하도록 전환되기 때문에 반드시 회개가 결합되게 된다. 회개에 있어서는 동일한 의지가 진정한 선을 행하도록 전환되며 죄 혹은 악으로부터 돌이켜 죄악을 증오하게 된다. 행19:4, 막1:15,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는 신앙과 동일한 원인과 원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엡2:8,이것이(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딤후2:25,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회개가 인간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해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의미할 때, 이는 신앙 이후에 오며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신앙에 의존하며 신앙을 가진 자에게 속한다. 이러한 회개가 항상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한 회한을 수반하지만, 회개는 회한보다는 죄로부터 돌이키고 죄를 미워하며 선을 따르겠다는 확고한 의도로 구성된다.
27 칭의
칭의란 하나님이 신앙에서 포착된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를 죄와 사망을 면하게 하고 그를 의롭고 생명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단이다. 롬3:22,24,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칭의란 판단(판결)을 선언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물리적인 실제적인 변화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판단을 선언하고 간주하는 데서 형성되는 법적, 도덕적 변화가 존재한다. 잠17:15,악인을 의롭다 하며;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판단은 첫째, 칭의를 작정하신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다. 갈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둘째, 칭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에서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에게 선언되었다. 고후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셋째, 칭의는 신앙이 생성되었을 때 맺어진 첫 번째 관계에 실제적으로 선언되었다. 롬8: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넷째,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음을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는 성령에 의해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롬5: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칭의가 은혜로운 판단인 것은 칭의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롬3:24,은혜로 값없이.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부르시고 선택된 자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부르시는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칭의는 그리스도 때문에 일어난다. 고후5:21,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담의 불순종이 크리마(범죄,롬5:16)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정죄한 것과 마찬가지로(롬5:18), 그리스도의 순종은 디카이오마(의,롬5:16)가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를 칭의하신다. 따라서 칭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된다. 빌3: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칭의는 직접적으로 죄의 고소, 오점 혹은 모든 결과들을 제거함으로써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칭의는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하는 죄책의 의무를 제거한다. 롬8:1,33,34,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칭의는 형벌 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죄에서 제거할 만큼 죄책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는 죄가 남아있는 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칭의는 죄책의 지속과 치명적인 효과들을 소멸시킬 정도로 죄책을 제거한다.
죄로부터의 용서는 성경에서 사죄, 구속, 화목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려진다,엡1:6,7.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죄가 죄책으로 인한 일종의 구속 혹은 영적인 포로로 이해될 때, 칭의는 구속으로 불린다.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할 때, 이는 사죄를 의미한다. 죄는 넘기시고, 도말하고, 면제하고, 치워버리고, 던져버리고, 제거하고, 등 뒤로 던져버린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죄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해될 때, 칭의는 화해라고 불린다,롬5:10. 때때로 사죄는 일종의 죄를 눈감아주고(민23:25), 죄를 덮어주는 것으로(시32:1,2) 간주된다.
칭의된 자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도 사해진다. 칭의는 정죄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칭의는 영생을 확고하게 즉시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된 자는 매일 사죄를 필요로 한다. 이는 은혜의 지속이 칭의된 자들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인식과 표현은 개별적 죄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한 점점 더 증대된다. 그리고 칭의에서 선포된 판결의 선고는 이로써 수행되고 완성된다.
죄의 용서 이외에도 의의 전가가 필요하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에게서 원의를 박탈하고 정죄 아래 복속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의의 전가는 사죄와 함께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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