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 기독교인과 박해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10절로서 그리스도인의 특징 묘사는 대체로 끝낸 것이다. 이 복은 제자들에게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복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극적인 성격 묘사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다른 복에 비해 간접적이지만, 주님은 ‘이것이 너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복이 화평케 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에 뒤이어 나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과 특징에 대하여 얼마나 큰 이해와 통찰을 주는 것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이 화평케 하는 자라면 박해는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 이 복에 대한 약속이 첫째 복에서 하신 약속과 같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내신 까닭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천명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받고 있고 충만히 받게 될 이 모든 복들보다 더 큰 복은 천국 시민이 되며 영의 나라에 소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복도 그리스도인의 특징의 하나임을 상기하자. 팔복은 모두 탐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어느 복보다 탐사성이 큰 면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복보다 더 조심해야 할 진술은 없으며, 이 복처럼 잘못 해석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 없다. 본문은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이며 불가결한 부분이다.
- “의를 위하여”
본문은 단순히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첫째, 본문은 반대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때문에,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그 무엇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조건은 ‘의를 위하여’이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고 잘못된 관념이나 자기 의로 고난을 자초할 수 있고 전혀 불필요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편견과 원칙의 차이를 올바로 분별하는 일에 더디며, 어떤 특별한 성격과 기질 때문에 불괘감을 주는 것과 의롭기 때문에 불괘감을 주는 것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둘째, 본문은 ‘광신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는다. 지나친 열심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를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와 같은 범주 속에 취급한 것을 주목하라.
셋째, 본문이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란 뜻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과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그런 박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와 정치를 혼합한다면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놀라선 안 된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위험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예리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들은 결국 정치관과 여러 가지 견해를 견지하고 있지만 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 복과 약속은 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만을 말씀하고 있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정치적 편견과 영적 원칙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와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또 한 가지 큰 위험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순수 기독교 신앙을 어떤 정치적이며 사회적 견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절대 별개의 것으로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앙은 반공산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가 반공산주의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는 셈이다.
넷째, 본문은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 희생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선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하고 고상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이것 역시 의심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칭찬하고 찬양하는 법이다. 의인들만이 박해를 당한다. 그것들이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실천했는가, 아니면 그것이 기독교와 다른 어떤 것인가, 즉 하나의 일반적인 고상성뿐이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 그러면 이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롭다거나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를 닮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뜻이다. 그 분을 닮은 사람들은 박해를 항상 받는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18-2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이것은 절대적인 진술이다. 이 복이 팔복 중에서도 가장 탐사성이 큰 복이다.
여러분은 박해를 받고 있는가? 이것은 성경에 일관되어 있다. 아벨, 모세, 다윗, 선지자들, 사도들, 그들이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의로웠다는 이유 때문이다. 최고의 모범은 물론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실만 했다. 누구도 그처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보라. 그리고 교회사의 긴 역사를 읽어보라. 순교자의 생애, 곧 존 후스나 언약교파 사람들이나 청교도들에 대한 기록을 보라. 18세기 부흥기간의 지도자들, 20세기 허드슨 테일러, 그들처럼 박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인이 누구의 박해를 받는가?
세상에서만이 아니다. 가장 격심한 박해의 일부는 교회 자체와 종교인들에 의해 의인들에게 가해졌다. 주님을 박해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었는가?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에게 잔인하게 박해를 받았다. 청교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사를 읽어보라. 신약성경과는 거리가 먼 기독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진실하고 참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좁은 길을 걸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일이 많았으며,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독교는 순수 신앙의 가장 큰 원수일 때가 많다.
의인은 어째서 이렇게 박해를 받는가? 의인이나 고상인들보다 박해를 받는가?
의인들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박해받은 것은 그가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무언가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고,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 버리게 한다. 그들은 자기네 의가 매우 값싸고 야하게 보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이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사람됨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을 바리새인과 기타 사람들이 미워한 까닭은 그 분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성결과 의와 진리 때문이다.
결론)
첫째,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이 불신자들에게 찬양과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 분을 미워했고, 그 분 대신 살인자를 선택하고 그를 죽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세상에 준 결과가 이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세속인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분을 보았더라면, 그분의 동시대인들처럼 그 분을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리스도관이 자연인이 쉽게 찬양하거나 갈채할 수 없는 올바른 그리스도관인가 검토해 봐야 한다.
둘째, 이 복은 우리의 기독관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멋지고 인기 있고 아무 사람도 성나게 하지 않고 따라서 지내기가 매우 쉬운 그런 그리스도인을 항상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지만, 주를 닮은 사람은 결코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중생이 절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전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다. 우리는 옛 성품을 제거해야 하며 의를 사랑하고 주를 사랑할 새 성품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려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칭찬할 것이요, 그리스도를 닮으려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혐오할 것이다.
-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빛은 항상 어두움을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항상 빛을 혐오한다. 우리는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해서 박해를 자초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음으로써 핍박은 불가피하게 온다. 이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이와 같으면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최종적 증거를 얻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특권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큰 지혜와 분별력을 주셔서 이것을 터득할 수 있는 지식과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고난 받아야 할 때 그 고난이 의를 위한 것이며, 이 영광스러운 복의 위로와 위안을 충만히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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