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16장 이같이 너희 빛을 비추어라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11. 6. 07:49

16 장 이같이 너희 빛을 비추어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5-16)

 

-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이 만드신 바 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볼 수 있기를 열망하셨다. 이 점이 성경을 일관해서 흐르는 큰 요지가 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들로 서술하며, 이런 까닭에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붙들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인 까닭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빛과 어두움의 대조법을 늘 쓰고 있다. 사도의 서신들은 이 문제를 푸는 많은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비중이 큰 일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째서 소금과 빛처럼 되어야 하는가? -

첫째, 우리가 그렇게 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금의 특성은 짠 것이고, 빛의 기능과 목적은 빛을 주는 일이다. 우리는 소금과 빛의 이 본질적인 기능들을 얼마나 잘 잊고 있는가? 등불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기 위해 켜진다. 불을 붙이는 목적은 그 빛이 그 지역 안에 퍼지고 발산되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 소금인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이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위치가 모순될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숨겨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는 대신 말 밑에 넣는 일을 상상해 보라. 등에 불을 켜는 목적은 빛을 비추기 위함인데 빛을 덮을 것으로 덮어서 가린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주님은 나는 너희를 빛과 같은 것으로 숨겨질 수 없는, 산 위에 서 있는 동네처럼 만들었다. 너희는 이것을 일부러 숨기려 하느냐? 이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셋째, 이것은 우리 자신을 철저히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소금은 이차적인 용도를 찾아낼 수도 없다. 소금은 소금기를 잃는 순간 아주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퇴비 무더기에 던질 수도 없다.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처리 방법은 제거하는 방법 뿐이다. 후에는 아무 밖에 쓸데없어 다만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빛의 특성은 그것이 빛이라는 것과 빛을 준다는 점이다. 이외에 다른 기능은 없다. 빛은 빛으로 행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가치를 잃는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보다 철저하게 무용지물인 것은 하나님의 우주 속에 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같으나 실제는 아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 잃은 빛, 말 아래 숨겨진 빛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세상을 못되게 만들만큼은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 어떤 적극적인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들을 두려워할 정도로 세상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세상과 함께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참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생명의 풍요를 얻을 만큼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속물의 기능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능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던져버림을 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인 삶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결국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간들이다. 이 경고는 마 25장의 비유들에 강조되어 있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맛을 잃어버렸거나 참 빛을 주지 못하므로 문자 그대로 발에 밟히운 교회들이 있다. 명목상의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숨겨질 수 없으며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소금과 같고, 산 위에 선 동네와 같고, 등경 위의 등불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빛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참으로 알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고 계속한다면 결국 내어 던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 속에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덮어버리려는 경향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을 검토하여 그것이 사실 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덮어 버리려는 사람이 아닌지 물어야 한다.

 

- 우리는 어떻게 소금과 빛의 기능을 확실히 할 수 있는가? -

등잔에 필요한 것은 기름과 심지이다. 이 두 가지는 절대 필요하며 항상 함께 붙어 다닌다.

첫 번째, 기름(열 처녀 비유)은 절대 중요하다. 팔복의 요점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기름 없이는 빛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빛인 것은 세상의 빛이신 이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거하심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방언이나 사람들이 그처럼 흥분하는 기타 특정 은사들을 주시는 데 있지 않다. 성령의 목적은 생명과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는 것인데, 이것이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고전12:31)인 것이다. 기름 곧 생명, 하나님의 성령께서만 내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가? 확실한가? 우리는 이것을 늘 변함없이 구해야 하고 공급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늘 접촉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변함없이 늘 받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임없는 기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채워지지만 항상 더 원한다. 우리는 결코 정지해 있지 않고 주리고 목마르는 일을 계속한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연구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름 공급 받는 일을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심지이다. 등불을 밝게 유지하려면 심지를 손질해야 한다. 심지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심지는 불빛을 내지 않는다. 심지를 손질하는 과정은 예민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팔복을 상기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되게 되었는가를 상기하는 일보다 심지를 더 잘 손질하는 방법이 없다. 하루 일을 시작하기 앞서 아침마다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말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팔복에서 보는 사람을 닮아야 한다.

또한 팔복을 상기해야 할 뿐 아니라 팔복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팔복의 성격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빛과 어두움의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이것이든가 저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다른 점을 보여줘야 함을 의미하며, 최소한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으므로 사회의 풍조도 점점 거칠고 조잡해지고 있다. 개개 그리스도인이 지난 세기들 보다 오늘에 더 큰 기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해야 한다.

 

-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이같이는 위대한 말씀이다. 여기에 겉치레는 전혀 없다. 소금과 빛의 기능과 겉치레가 없는 것과의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은 실제로 어렵다. 그리스도인의 기능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삶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어떤 쇼맨쉽을 가져서는 안 된다.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자아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비워지고 산산히 부셔져야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마음에 큰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로 유도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닮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고, 큰 슬픔을 느끼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행동을 결정한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항상 해야 한다. 모든 것의 기초를 그들을 위한 사랑에,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그들을 연민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와 반대되는 자들을 비웃으신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그들이 주를 볼 때에 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가 그들에게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은 어째서 매사에 이처럼 다른가?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라고 물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해석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반사체요,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자들이 되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신 것같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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