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장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관하여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 앞서 이 대목을 해석하는 원칙들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이 대목에 올 때 상세한 점에 너무 몰두하여 여기에 표현된 큰 원칙, 곧 그리스도인의 자신에 대한 태도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 앞에서 본 실례들은 주님이 이 원칙에 대한 가르침을 표명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 자신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너희의 문제는 너희가 이 점에 잘못을 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있다. 행함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됨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산상설교를 그 순서대로 취해야 하는 것이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가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실제적인 교훈이며 하나의 윤리 선언서이므로 신약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산상설교는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편 뺨을 돌려대는 것에 있지 않고 그렇게 할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 곧 자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고, 특히 흔히 ‘자기 권리’라 일컫는 그것을 처리하지 않는 한, 아무도 주님이 여기에 든 실례를 실천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온갖 문제거리는 궁극적으로 자아에 대한 이 관심사이며, 자아는 우리가 전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찾으며 항상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서 모욕이나 공격이나 가해를 찾는 경향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에 대해 민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고전4:3) 바울은 자기를 판단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일임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자아와 자기이익에 대한 무관심인 그런 상태이다.
죠지 뮬러의 기록 - “언젠가 제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죠지 뮬러와 그의 의견과 그가 좋아하는 것들과 취미 및 그의 의지에 대해 철저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시인과 비난에 대해 죽고, 나의 형제와 친구의 시인이나 꾸지람에 대해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골몰해왔습니다” 뮬러는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있었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의 비난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자기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다. 먼저 처리한 것은 세상이었고, 그런 다음 가까운 사람,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에 대해 죽는 것이다. 모든 것의 열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를 주장하고 항상 자기와 자기 명예를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찬양한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외에 자기에 대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듭나야 하며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중생의 교리이다. 이것은 중생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먼저 이 자아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내가 방어적 심리작용을 느끼는 순간, 조용히 나를 대면하여 다음의 질문을 물어봐야 한다. “이것이 어째서 나를 흔들어 놓는가? 이 점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나는 공의와 의에 대한 일반원칙에 참으로 관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인가? - 그것이 바로 더러운 자기중심성과 자기관심이며 불건전한 교만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이러한 자기검토는 이 문제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이것은 극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자아의 부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가 삶을 지배하는 법위를 인식하는 일이다. 자기의 삶에 자기 이익과 자기관심이 개입되는 범위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요, 무서운 발견이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우리의 삶의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기타 문제거리가 오직 한 가지, 자아 때문이라는 것과 그 범위를 여러분은 인식하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난 주일로 돌아가서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고 부끄러운 한 순간 한 순간들을 양심에 비추어 보라. 그 모든 것은 거의가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 민감성, 이 자아 주시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꾸짖어 마땅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다. 실제적으로 이것을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불행과 슬픔과 삶에서 오는 문제거리의 대부분은 그 근원적인 출처인 자아에서 오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타락은 그 책임이 자아에 있다. 자아가 아니었다면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자아의 세력을 충분히 알고 있을 만큼 영리했다. 그래서 마귀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를 짓게 했다. 마귀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다. 너는 정당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다. 이것이 타락의 원인이었다. 모든 문제는 바로 자아, 자기주장, 때문인 것이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자아는 하나님 대신 자신을 보좌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자아이다.
삶의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하다. 땅굴에 있든, 발이 착고에 메여 있든, 화형을 당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때는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대신 우리 자신을 보고 자신을 생각하는 때인 것이다.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는 욕망은 죄이다. 성결은 결국 이 자아 중심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성결은 근본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결의 본질은 이 자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으며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죠지 뮬러와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인식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이셨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이것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다. 자기를 제쳐놓지 않으셨다면 성육신은 없었을 것이다.
지상에서 그분의 자기를 돌보지 않은 삶을 보라. 자기가 한 말이나 행한 일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셨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이렇게 낮추셨다.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살지 않으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것의 극치를 십자가 위의 그분의 죽으심에서 보게 된다. 그분은 결코 죄를 범하거나 어느 누구에게 해를 준 일이 없었으나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였다’(벧전2:23)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최고의 실례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최대갈망은 자아에 대하여 죽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모범이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만드신 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 위의 죽으심의 이유는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과 결별하기 위한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15) 우리는 이런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자기방어나 자기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모욕을 당하더라도 보복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오른 뺨을 맞는다면 다른 뺨을, 속옷을 벗겨간다면 겉옷도, 5리를 강요하면 10리를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무언가를 내게 구한다면 내 것이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궁핍하고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를 돕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자아를 끝장내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다. 나의 모든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경배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동시에 복음은 우리에게 그가 다시 사셨고, 성령의 회복력과 활력을 교회에 보내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런 유의 삶을 살려 한다면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파멸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우리들 속에 오셔서 거하시며 일하심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셨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게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자아는 너무 사악하여 큰 고통과 불행으로 인도하며, 끝내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의 하나님의 아들의 복되신 사역까지 부정해 버리도록 한다.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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