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장 기도하는 법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8. 2. 2. 01:04

2 장   기도하는 법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5-8)

 

기도하는 문제, 곧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전체 문제가 나온다. 이 대목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탐사성이 크고 우리의 교만을 꺾는 대목의 하나라고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이 바리새인들을 질타하는 글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 글을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는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이 대목은 죄가 사람의 영혼에 남긴 무서운 결과를 강력하게 폭로하시는 것이요, 특히 자아와 자긍의 죄를 노출시키고 계신다. 이것이 여기의 가르침이다.

 

죄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심지어 천국 문에 까지 따라올 뿐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천국 안으로까지 따라들어 오려할 것이다. 죄는 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도 천사는 타락해 있었다. 죄의 가공스런 성격을 행동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본질은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성향이요, 죄는 마음의 상태요, 죄는 궁극적으로 자기 경배요, 자기 아첨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애쓸 때마저도 사실은 우리 자신을 예배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체질과 성격 속에 들어온 죄는 가장 고상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할 전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죄가 누더기를 걸치고 삶의 시궁창에 빠져 있는 것을 보는 식으로 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죄의 참 모습을 보고 죄를 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성도,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 존전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의 그를 보라. 거기에서도 자신을 예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죄의 참 모습이다. 여러분이 사탄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우리 주가 40 주야를 보내신 광야로 가라. 죄는 우리를 따라 하나님의 존전에까지 들어오는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 절대 필요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거듭나고 새 생명과 새 성품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교훈들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우리 주의 교훈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기도와 헌신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이 위선의 죄책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기도의 거짓된 방법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거짓된 기도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접근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과오는 내가 바리새인일 경우 나의 관심은 기도하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과오는 나의 기도의 효험이 기도의 분량이나, 특이한 기도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첫째 문제,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려 안달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의 다음 단계는 이것이 적극적이며 실제적인 욕망이 되어 그가 기도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바라는 단계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될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작가가 성스러움을 예시하기를 어떤 사람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걸어갈 때 갑자기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는 걸어가곤 했다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주의 가르침으로 볼 때, 이 사람이 무릎을 꿇지 않고 차라리 복도를 걸어갈 때 기도를 드렸다면 그가 더 위대한 성도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은밀히 기도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 위험은 너무 교묘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별난 짓은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그 자체를 주의 환기시키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파고 들어가 이것이 취하는 또 다른 형태는, 존경과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접근하기보다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는 욕망에서 공중 앞에 기도하는 일이다. 저는 기도가 항상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씨와 어휘 등에 주의를 기울이고, 완벽하고 세련된 태도로 말하지 않는 법이다. 참된 교제와 친목에는 본질상 자연스런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저는 소위 강단기도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의 전 존재는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하며, 기타 모든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18세기의 위대한 전도자들의 기도의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19세기의 소위 강단 거인들의 인기 있는 기도의 기록은 많이 가지고 있다.

 

둘째 문제, 기도형식이나 기도에 소비하는 기도의 분량 또는 시간에 주의를 집중할 때 일어난다. ‘중언부언은 기도윤당이나 염주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훨씬 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만일 관심사가 기도하는 일 자체보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것에 기우려진다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슬람인들이 정해진 시간에 무릎을 꿇는 것에 방해가 되면 화를 내며 정해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 교묘한 위험은 예를 들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길은 기도로 하나님 존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자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있었으며, 기도는 그의 생활이었고 기도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원했고 그것을 받았다. 가련하게도 이것이 그들이 얻은 모두였다. 문장 하나를 제대로 꿰어맞출 수는 없으나 고통 중에 하나님께 울부짖는 가련하고 애끓는 영혼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것이다.

 

- 기도의 참된 방법

 

그것은 접근 방식 여하에 달려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모든 것은 바로 될 것이다.

 

우선 배제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잊어버리고, 자신도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골방에 들어가라의 의미이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골방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공중의 기도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설교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강단에 올라갈 때 제가 애써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회중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저는 그들에게 기도하거나 설교하지 않는다. 저는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저는 기도로 하나님께 인도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나 자신을 잊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도 나를 배제해야 한다. 나의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만 열려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리이다”(86:11-12)

 

다음 단계는 인식의 단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인식해야 한다. “나는 지금 전능하시고, 절대자이시며, 영원하시고, 높고 크시며, 소멸하는 불이 시며 빛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알현실에 들어가고 있다이것을 상기하고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이것에 추가하여 그가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너는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기도할 때마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는 것과 같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받기를 원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우리를 축복하고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큰 뜻을 갖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것이 참된 기도의 관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끝으로 우리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단순한 어린아이의 신뢰를 가지고 와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한 가지에 대하여 예민과 관심과 갈망을 보여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곧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이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로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하신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로 좋은 것을 사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충만하심으로 축복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제하며, 인식하며,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의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뢴다. ‘아버지가 항상 이렇게 해주신다라고 말하며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 아버지가 어린아이가 계속 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의 존전에 오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의심하는 마음으로 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으려는 것 훨씬 이상으로 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결과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공석에서 갚으시리라가 될 것이다.

 

우리가 왕 노릇하게 되어 있는데도 가난뱅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것은 모두 두려움 때문이다. 어린 아이의 단순함과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할 것이며 너무 압도해 와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 이제 그만 멈추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믿자. 그런 다음 단순한 신뢰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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