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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4장 영국 청교도의 실천적 저서들(1) (강의안)

강대식 2018. 2. 2. 01:18

4장  영국 청교도의 실천적 저서들

 

1. 국교회의 상태

 

1570애정깊고 실제적인목회자들과 저술가들의 아브라함이 자신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갔으니 그의 이름은 리차드 그린햄이었다. 그는 자기 도시에서 약 7마일쯤 떨어진 드라이 드레이턴의 목사가 되기 위해 켐브리지의 펨브로크 문학회의 특별 회원의 지위를 사임하였다. 그는 박스터 유형의 선구자적 개혁된 목회자였으며 진정한 사도적 방법으로 영국 농촌에 복음을 뿌리내리는 과제에 도전한 첫 번째의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회 상담자. 또는 영적 의원으로서의 큰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성직 수임 후보자들이 사실상 견습생으로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 공부했다. 지역의 목회자들과 먼 곳으로부터의 방문자들이 항상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렇게 그린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봉사와 목회 사역에 많은 경건하고 학식있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양성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요, 수단이었다.”고 홀란드는 말한다.

 

그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대학에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캠브리지의 장로교 선동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방침은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자신을 개혁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교회 기율에 바빠서 자신의 사적인 타락을 보지 못한다.“.

 

캠브리지에서의 그의 모든 영향력은 인격적인 신앙과 교회의 평화를 조장하고 죄와 교회의 분립을 막는 데 기울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평화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나 심지어 자신이 공감하는 견해들까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대하였다. 그가 요청한 모든 것은 자기 양심에 순종하고 자기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유였다. 그는 영적 암흑으로부터 지역을 인도해낼 청교도 목회자들의 새세대의 전형이었다.

 

다른 반 세기 이상에 걸쳐 캠브리지는 그린햄 형의 많은 영적 의원들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그들의 양성소는 그리스도의 대학이었다. 로렌스 체덜턴은 캠브리지의 재학생 시절에 신교도가 되었고 1584년 임마누엘 대학의 초대 교장이 되기 전에 20년의 가장 좋은 기간 동안 캠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있었다. 채덜턴은 50년 동안 성 클레멘트 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 강의’(설교)를 했다. 그리고 82세에 설교를 그만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40명의 성직자들에게서 설교를 그만두지 말기를 간청받으며 자신들이 그의 사역의 덕택으로 회심을 하였다고 증거하는 서신들을 받았다. 풀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채덜턴은 언젠가 두 시간 동안 설교를 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하자 청중들이 하나님을 위해 계속해 주십시오, 계속해 주십시오라는 눈물의 외침을 들었다고 한다. 1574년부터 웨드스필드에서 목회를 한

 

또 한 명의 그린햄’, 리차드 로저스와 윌리암 구쥐와 존 프레스턴의 선도자이며 아쉬비델라 주크에서 40년 동안 설교했던 아더 힐더샘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 재학생 시절에 회심하여 1584년 특별 연구원이 된 채덜턴의 제자 윌리암 퍼킨스도 그러했다. 퍼킨스가 1602년 사망했을 때 뒤를 이어 성 안드레 대교회에서 매주 강의했던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의 사람 폴 베이네스는 리차드 십스를 설교로 회심하게 했고, 리차드 십스는 존 코턴을 설교로 회심시켰고, 존 코턴은 존 프레스턴을 설교로 회심시켰다. 구드윈이 1613년에 20세의 나이로 그리스도의 대학에 왔을 때 청교도로 칭해지는 여섯 명의 특별 연구원 교수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교장인 메인브릿지가 한 회개에 대한 설교는 곧 구드윈 자신을 회심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채덜턴, 로저스, 힐더샘, 퍼킨스, 구쥐, 베이네스, 십스, 코턴, 프레스턴 그리고 구드윈 모두는 애정깊고 실제적인목회자와 복음 전도자들 중에 모범적인 역할을 하는 지위를 얻었다. 이렇게 캠브리지 운동은 항상 영적 깊이를 유지하며 또한 숫적인 힘을 모으면서 진행되었다.

 

놀라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슬픈 사실은 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에게서 본을 받은 젊은이들이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캠브리지 대학생이 1586년 의회에 낸 탄원은 이 문제에 있어 행동을 요구한다.

 

현재 우리 대학에는 이 땅의 대부분에 있어 해결되어야 하는 공통 과제인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위해 충분한 은사를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 중에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 직무에 부름을 받는 자는 거의 없다. 무식한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 쓰레기인 자들은 수천의 영혼들의 파멸과 하나님의 교회의 수치와 학문의 완전한 멸망을 오히려 좋아한다. 우리 자신이 책임을 맡는 어떤 수단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성직 임명자들의 탐욕이 이처럼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성직 매매, 거짓 서약, 나아가 거의 명백한 동냥의 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일꾼이 크게 부족한 가운데 우리는 하루 종일 시장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우리 교회의 상태는 이처럼 탄식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공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으나 이 젊은 청교도들에게 설교직을 주기 위해 많은 교구들에 강사직이 생겼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제임스 그리고 찰스 시대에 영국 도처에 복음의 누룩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2. 청교도 저서들

 

모든 사상 운동은 그 자체의 문헌을 필요로 하는데 청교도 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쾌하고 단순한 문체의 은사를 받은 퍼킨스는 이 점에 있어 선구자였다. 1589년 그는 청교도의 경건을 장려하기 위해 설교 형식으로 쓰여진 일련의 대중적인 책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정죄의 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은혜의 상태에 있는지를 선포하기 위한 논문>, <금사슬 이론; 구원 계획에 대한 칼빈주의적 연구>, <영적 방치>, <육과 영의 전투>이다.

 

뒤를 이어 리차드 로저스는 <7개의 논문--이생과 장래의 생 모두에 있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인도와 안내--기독교 신앙의 실행--그 중에 가장 특별히 참된 그리스도인은 매일 경건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기독교 신앙의 실행>을 썼다. 존 다우네임은 <그리스도의 전투>를 썼고, 아더 덴트의 <천국으로 가는 인간의 평탄한 길>,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실천>, 존 도드와 로버트 클리버의 <십계명>이 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와 동일 수준인 평신도 수준으로 저술함으로 곧 매우 넓은 독자층을 획득할 수 있었고 17세기 전반에 있어 그들의 서적들의 영향력은 원대하고 깊었다.

 

두 세대에 걸친 청교도 서적들의 영향력은 그린햄의 드라이 드레이턴 목회와 박스터의 키어민스터 목회를 비교해 봄으로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린햄은 20년 동안 수고하였으나(1570-1590)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박스터는 14년 동안(1641-1642,1647-1660) ‘그때까지 생명력있고 진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상황에서 사역하여 약 8백 가정과 2천여명의 건강한 성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대부분에서 나는 얼마나 가치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인가--나의 어린 시절의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서 50년 동안 수고하고도 자신들의 교구에서 한 두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하게 나를 격려해 주시다니!”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경우에 있어 사용된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박스터도 강단에서나 개개인들과의 교제에서 나 자신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며평생을 보냈다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세대의 청교도 설교와 경건한 저술들에 발효된 박스터의 영국은 그린햄의 영국과는 다른 곳이었다. 묵은 땅이 파헤쳐져 수십 년 동안 충실하게 씨가 뿌려져서 이제 추수기가 이른 것이었다. 그린햄과 로저스와 같은 사람들을 목회로 인도했던 회심된 공동체라는 박스터의 목회 비전이 결국 그 성취를 보게 된 것이다.

 

공화국 시기 동안 영국의 많은 지역에 추수의 태양이 밝게 비추었으나 곧 폭풍의 구름이 다시 몰려와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역사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어두운 그림자에 덮혀 끝이 난다. 1640년대에 정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일치하지 못했다(이것이 크롬웰이 그 자신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던 바와는 반대로 마음 내키지 않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에 일치하였으나 교회 종류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괴한 행동들과 광신이 들어와 청교도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심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제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내적인 빛의 인도들을 확인했다. 목회자들은 영원의 빛 가운데 땅에서 사는 기술을 가르쳐 왔으나 이제 열심파들은 17세기에 영국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직분을 높여 왔으나 이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영감을 받는 대로 자기 생각을 담대하고 무제한적으로 공공연하게 발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설교자들은 성령이 없는 학문은 성경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해 왔으나 이제 교육을 통해 부적격자도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적으로 학문을 갖춘 청교도 목회자들이 이 경향들에 대해 반박하자 퀘이커교도들, 광적인 설교자들, 머글레토니안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스터는 이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는 인쇄물들의 활동에 무엇인가 마귀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다. 1653년에 나는 최근 인쇄물의 방종하고 사치한 범람은 전에 사람들에게 읽혔던 분별력있고 경건하고 뛰어난 저술들을 매장시키고 압도해 버리려는 대적의 계획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혼란과 불안이 만연하고 있었다. 청교도 부흥은 스스로의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죽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왕정과 영국 국교회의 의 복고는 필연적인 반동으로 1660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이 결과는 재난이었다. 무시무시한 클래런던법이 그들을 몰아내고 억압하였다. 그들이 영국 국교회 밖에서 지속하던 사역은 불법이 되어 그들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밀어넣어졌다. 존 오웬, 토마스 굿윈, 존 하우, 리차드 박스터, 스티븐 차녹과 같은 위대한 목회 신학자들은 이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많은 저술을 했고 번연의 훌륭한 우화들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영국 교회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그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젊은 비국교주의자들에게 문을 잠그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의 동류를 효율적으로 재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조직화된 비국교주의는 자유가 도래했으나(1689) 그들의 선구자였던 청교도 사상의 장성함에 이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1705년 마지막 거인인 존 하우가 죽었을 때 청교도 운동도 끝이 났다.

 

3. 청교도 저술가

 

경건한 청교도 저술가들 중에 리차드 박스터는 처음부터 내용과 양식 모두의 장엄함에 있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았다. 문체의 명쾌함과 힘, 질서와 열정, 지혜와 온정, 넒이와 깊이, 목회자의 신실성과 권위는 그의 모든 애정깊고 실제적인저작들에 함께 나타난다. 첫 번째의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독교 훈령집><빈자의 가정서>, <가정교리 문답> 이 시리즈는 청교도 경건 서적의 정점이며 청교도의 영적 가르침의 영향을 받는 넓은 세계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손쉽고 편리한 지도서로 기여할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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