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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5장 기도는 경배로부터,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8. 2. 7. 19:56

5 장   기도는 경배로부터

 

-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기도의 첫머리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간구가 나온다. 중대한 것은 간구의 순서 간구들의 비율이다.

처음의 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있다. 그 뒤 나머지 간구는 우리들과 관계되어 있다.

 

또 중요한 것은 간구들의 비율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소원과 간구가 우선해야 할 뿐 아니라, 간구들의 절반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바쳐져 있고, 그 나머지만이 우리들의 필요와 문제점들을 취급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 세 간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세 간구는 항상 하나님의 수이며,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4는 항상 땅의 수이며 인간적인 모든 것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에 네 짐승이 나온다. 734를 결합한 수로써 완전수를 나타낸다. 여기 주기도에서 땅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와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우리들이 파악해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들 자신들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의 간구로 출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의 간구가 최고 수준에 도달할 때마저도 적용된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관심사마저도 첫 번 위치에 와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처지나 형편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명예에 대한 이 지대한 관심사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원칙의 영역에서 과오를 범할 때가 너무 많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참된 의미의 기원으로 기도를 시작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 존전에 있으며,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상기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점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모든 기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다.

 

- 첫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우리는 이제 하나님 존전에 있음과 그분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소원이요, 첫째가는 간구여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거룩히 여김이란 말은 신성하게 한다’, ‘존경한다’, ‘거룩하게 한다’, ‘거룩하게 유지한다는 뜻이다. 이름은 유대인이 흔히 하나님을 가리키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그들의 감각이다. 그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을 의미하며, 이 간구의 목적은 하나님이 존경을 받으시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이 표시하고 나타내는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영화롭고 온 세계를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한 이 소원을 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에 의하면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과 하나님에 대해 계시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시고 지금도 행하시고 계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셨다. ‘’, ‘엘로힘’(하나님의 힘, 능력). ‘여호와’(스스로 계시는 분, I am that I am). 여호와 이레(주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여호와 랍하(병 고치시는 주). 여호와 닛시(깃발이신 주). 여호와 샬롬(우리의 화평이신 주). 여호와 라아(우리의 목자이신 주). 여호와 차드케누(우리의 의이신 주). 여호와 샴마(주께서 나타나시다) 등이다. 하나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 여러 가지 이름을 주심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셨고, 그의 성품과 존재와 성격과 속성을 인류에게 계시하셨다. ‘이름은 이 모든 이름을 표상한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온 세계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로 기도하게 가르치고 계시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를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이름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바라는 강렬하고 깊은 소원의 표현인 것이다. 주님의 한 가지 소원은, 인류가 이 영광을 알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17:8)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하찮은 관념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능력과 위엄 의식마저도 결여되어 있다. 그 이름을 사용할 때마다 발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섭리를 얼마나 하찮게 평가하고 있는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반석으로, 우리의 평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로, 우리의 의로, 그리고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변함없는 분으로 찬양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가? 간구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이렇게 알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불타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34:3)라고 권면한다. 얼마나 이상한 관념인가? 연약한 인간이 우리가 어떻게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심이 사람들에게 크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데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로, 생활로 하나님의 크심과 영광과 그 영화로운 속성들을 반영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이 간구의 의미이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고 있는가? 기도할 때마다 이것이 항상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되고 있는가?

주님은 너희의 가장 큰 소원은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서 너희 아버지 되신 이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겁한 두려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건과 공손한 경외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싶으면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 두 번째 간구, “나라가 임하오시며- 이 여러 간구에는 논리적 순서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을 간구함으로 시작했다. 어째서 사람은 이 신성한 이름 앞에 허리를 구부리지 않는가? 그것은 물론 죄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 세상의 신이 있다. 악의 나라인 흑암의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영예를 대적하고 있다. 구약을 일관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예언들이 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천국의 도래에 대비하라고 외쳤다. 우리 주님이 전도를 시작하셨을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이 기도는 종말이 올 때까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그러하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법과 지배를 의미한다. 그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땅에 계실 때 그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순간에 여기, 주님께 복종하는 모든 마음과 삶에, 그를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속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이제 그의 나라가 여기 지구상에 서게 될 날이 오려하고 있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이 날을 고대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그때에야, 주께서 이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하심이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실로 이것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할 수 있도록 우리는 큰 뜻과 갈망을 품어야 한다. 그 나라가 우리들 마음에서 확장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확대되는 것을 열망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오시며는 복음의 영향력과 능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며, 포괄적인 선교 기도인 것이다.

이 간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고 있음’(벧후3:12)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것과 악과 잘못이 최종적으로 뿌리 뽑힐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께서 다시 돌아오시고 그에게 적대하는 모든 것이 불못에 던져지고 이 세상 나라들이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 셋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둘째 간구가 첫째 간구의 논리적 결론이 되는 것처럼 이것은 둘째 간구로부터의 일종의 논리적 결론이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하늘나라에서의 최고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도 이렇게 되는 것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그 나라가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땅 위에서 사람들 가운데 서기까지 이 간구는 결코 성취되거나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가서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에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 그 때에는 하늘나라와 땅이 하나가 될 것이며, 세상은 불타 없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 위에 비칠 것이다.

 

-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침 받는다. 우리의 최상의 갈망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갈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한 우리의 갈망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갈망보다 더욱 커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를 위한 갈망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괴롭히고 근심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죄의 나타남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인가?

의로우신 어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17:25)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혼란케 하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가혹한 율법을 주신 자로 생각합니다. 세상은 아버지가 세상을 적대하고 폭군으로 군림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버지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그와 같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이것이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으므로 우리의 갈망은 온 세상 역시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 기도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올바로 기도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만약 바르게 기도했다면 다음 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주께로 돌아서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소서라고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께서 이미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 모범기도에서 그토록 명백히 가르쳐 주신 원칙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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