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신학이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엄청난 신학이 들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산상수훈은 예수 자신을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인물로 제시한다. 전체 교훈에 퍼져 있는 그 기묘한 느낌의 권위에 그것이 제시되어 있다. 바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반복되는 표현이 그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말을 자신이 신적으로 여긴 성경의 말들과 동등하게 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선지자가 이런 방식으로 말했는가? 선지자들은 “주께서 이르시되”라고 말했지,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선지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말했다면 가증스럽고 우스꽝스러웠을 방식으로 말하는 엄청난 한 인물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7:21-23에 나타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단락은 어떤 면에서는 현대 자유주의 설교자들이 좋아하는 교훈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신조에 대한 동의나 심지어 예수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료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의무 이행에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의기양양하게 이 단락을 인용한 사람들은, 잠시 멈춰서, 동일한 단락에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예수의 말에 달려 있다는 이 다른 쪽 그림의 엄청난 사실도 반추해 보았을까?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온 땅의 심판자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하는 축복에서 영원히 분리될 사람을 결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하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겸손한 의의 선생이라고 주장하는 예수가 어떻게 이런 인물일 수 있는가? 심지어 그들이 엄선한 산상수훈 속에서도 신학을 피할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예수 자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엄청난 신학이 모든 가르침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 신학 마저 제거하고 윤리적 부분만으로 만족할려고 한다. 산상수훈의 윤리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효과가 없다. 황금률이 한 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이며, 실제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짧은 경험만 놓고 보아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술주정뱅이가 그 나쁜 습관을 끊도록 돕다 보면, 당신은 현대인들의 산상수훈 해석을 곧 불신하게 될 것이다. 술주정뱅이의 친구들이 그 규칙을 너무나 잘 적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곧 그에게 술을 사주는 것이다. 황금률이 바로 도덕적 개선을 막는 강력한 장애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규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에 있다. 황금률이 산상수훈의 다른 규칙들과 함께 온 세상을 향해 주어졌다고 가정하는 것이 오류다. 사실 이 전체 가르침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외부 세계는 그들로부터 명백하게 구별된다. 황금률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큰 변화가 발생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게 만든 변화다. 그런 사람들은 순결한 욕구를 가질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상하고 순결한 것을 해주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산상수훈 전체가 그러하다. 산상수훈의 새로운 법은 그 자체로는 절망만을 가져다준다. 현대인들이 황금률과 예수의 고상한 윤리적 원리만이 자기들에게 필요하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 만약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예수의 가르침 그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절망이다.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가 요구한 마음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는가? 바르게 해석한다면 산상수훈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구원의 수단을 찾게 만든다. 심지어 모세도 우리에게는 너무 높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예수의 율법 앞에서 누가 정죄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신약성경의 나머지 전체와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은 우리를 곧장 십자가 아래로 인도한다.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단지 사제지간이었다고 보는 것은 복음서를 피상적으로 읽은 결과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을 자기 학파로 부르는 철학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로서 하는 말이었다. 제자들도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설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오직 예수만이 그들을 그리로 들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예수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오직 예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신뢰 속에서 앞으로 모든 기독교 신조의 위대한 신학이 나올 수 있다.
복음서의 예수가 생생한, 살아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그와 생명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는 1,900년 전에 죽었다. 그 삶 속에는 우리를 위한 자리가 없다. 자신을 속이지 말자. 1세기 유대인 스승은 결코 우리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우리도 저 슬픈 날들의 어둠 속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거기서 벗어나 오순절의 온기와 기쁨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
만약 우리가 예수의 인격에만 집중하고 그가 이룬 것을 무시하거나, 그 인물에만 집중하고 그의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암울함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슬픔 대신 기쁨을, 연약함 대신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손쉬운 타협에 의해서나, 논쟁을 회피함에 의해서나, 예수는 붙잡고 복음은 거부하면서 그것을 얻을 수는 없다. 슬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영적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된 자들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에 그와 가졌던 접촉이 가져다준 영감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그가 부활했다”는 메시지였다. 오직 그 메시지가 그들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다. 오직 그 메시지만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물에만 집중하고 메시지를 간과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와 생생하게 접촉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로 인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부활의 사실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가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를 그가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또한 우리를 구원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그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했다. 우리를 위해 그는 죽었다. 우리의 무서운 죄책,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 이것이 은혜의 행동에 의해 제거되었다. 바로 이 메시지가 우리를 예수에게로 이끌며, 그를 오래전 갈릴리 사람들의 구주만이 아닌 당신과 나의 구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지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인물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신뢰란 신뢰하는 사람과 신뢰받는 사람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인격적 관계는 복된 십자가의 신학에 의해서 확립된다. 로마서 8장이 없는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죽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혹은 그 장이 포함하고 있는 메시지를 통해서 예수가 오늘 우리의 구주가 되는 까닭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라는 인물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뢰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감탄 혹은 존경의 의미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모든 역사의 지고의 인물로, 혹은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자로만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고의 인물이 그의 구원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일 때만 신뢰가 일어난다. “그가 다니면서 착한 일을 하셨다”, “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존경이고,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라는 말은 역사적 형식의 말이다. 그것은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이며, 사실에다 그 사실의 의미를 첨가한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심오한 전체 구속 역사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 교리가 믿음의 뿌리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비교리적인 종교 혹은 일반적 진리에만 근거한 종교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울뿐 아니라, 초기 예루살렘 교회뿐 아니라, 예수 자신까지 포기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적인 설교에서 교리에 대한 현대적인 욕설이 동원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칼빈이나 투레틴 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신학자들에 대한 공격이 현대의 교인들에게는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리에 대한 공격은 교회를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정하는 만큼 아무 잘못 없는 그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은 곧 신약성경의 핵심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 공격은 17세기 신학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 나아가서 예수 자신에 대한 공격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을 위대하게 설명한 역사적 내용에 대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불행한 일이다. 만약 교회가 1.900년의 기독교 역사의 모든 연구와 사색의 결과물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면, 설령 성경이 그대로 보존된다 하더라도 그 손실은 엄청날 것이다. 이전 세대들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각 세대가 이전 세대의 성취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면, 어떤 학문에서도 참된 진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학에서는 과거를 매도하는 것이 진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그 매도는 얼마나 천박한 악담에 근거하고 있는가!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에 대한 거창한 비난을 들은 사람이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읽거나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신학적인 책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 다소 충격을 받고, 그 과정 속에서 현대의 얄팍한 용어들에서 등을 돌리고 매 단어마다 생명이 약동하는 “죽은 정통”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정통 속에 온 세상을 기독교의 사랑으로 환히 빛나게 하기에 충분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교리”에 대한 현대의 악평 속에는 위대한 신학자들과 신조들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신약성경과 우리 주님에 대한 공격도 들어 있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어떤 염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있는 기독교 전체 토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자유주의 신학은 전적으로 명령법의 분위기이지만 기독교는 큰 승리를 거둔 직설법과 함께 시작하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지만 기독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적 근거를 견지함에 있어서 특별히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리가 건전하기만 하면 생활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리는 온갖 것에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삶의 길이었다.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복된 소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들이 낯설고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직하고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삶이었다. 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다른 모습의 삶은 엄격하게 배제되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분명히 삶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삶이 나왔는가? 도덕적 권면에 의해서인가? 그리스도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 순회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권면은 힘이 없었다. 견유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의 이상이 높긴 했지만, 그 설교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기독교의 이상한 점은 그것이 전혀 다른 방법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 것아 아니라,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변화시켰다. 권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종교적 지도자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여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메시지의 어리석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 효과는 지금 세상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유창한 권면이 실패하는 곳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가 성공한다. 사람들의 삶이 뉴스 하나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것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기독교 메시지가 특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런 삶의 변화다. 만약 우리의 교리가 바르고 우리 삶이 틀렸다면 우리의 죄는 얼마나 큰가! 이런 경우 진리 그 자체를 멸시하는 일이 되고 만다. 또한 사교적 예의와 도덕적 탄력에 기반하여 거짓된 메시지를 추천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진리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가 교리적 기초를 가진다는 사실을 주장한다고 하여 교리의 모든 요소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견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안에서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견해의 차이 중에서 최근 중요해지고 있는 것 하나가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의 순서에 관한 문제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이 믿는다. 세상에서 악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주 예수께서 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의의 통치를 이루며, 그것이 천년 동안 지속된 후에 비로소 세상의 종말이 임한다는 것이다. 본 저자의 생각에 그 신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의해서 초래된 오류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미래 사건에 대한 그런 분명한 청사진을 제공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서 “천년왕국” 혹은 “전천년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방법과 함께 결합하여 결국에는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전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우리가 일치하는 게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우리와 똑같이 존중하며, 성경의 해석에서만 차이가 있다. 그들의 오류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의 위대한 신조에 대한 충성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적인 교제 속에서 연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견해 사이의 문제로 말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그것이 전천년주의든 반대 견해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자연주의와의 대립이다.
기독교적 교제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는 또 다른 견해 차이는 성례의 효력에 대한 차이다. 그 차이는 실로 심각한 것이다. 이 심각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에 관한 논쟁에서 잘못된 편을 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오류다. 기독교계의 분열 상태는 악이라고 한다. 그것은 실제로 그렇다. 분열을 일으키는 오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악이지, 일단 오류가 존재할 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루터와 스위스 종교개혁 대표자들이 마부르그 회합에서 만났을 때, 루터가 주의 만찬에 관하여 책상위에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쓰고서 쯔빙글리와 이코람파디우스에게 “당신들은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큰 재앙이었다.
이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는 갈라졌으며, 확보할 수도 있었던 더 큰 공동기반을 개신교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재앙은 루터가 주의 만찬에 대해 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반대자들에게 “형제들이여, 이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주의 만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실은 별로 큰 차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경우보다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 무관심은 교파들 사이의 모든 분열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주의 만찬에 관해 타협했을 루터라면 보름스 회의에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는 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신앙의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
목회의 성격과 특권에 관한 또 다른 견해 차이가 있다. 성공회는 “사도적 계승” 교리를 주장한다. 다른 교회들은 이를 부인하며, 목회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뿌리에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양심적인 성공회 교인도 개개인이 다른 교파에 속한 개인들과 기독교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또한 목회에 대한 성공회의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도 성공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참되고 매우 고귀한 자체로 간주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또 다른 견해 차이는 칼빈주의 신학 곧 개혁신학과, 감리교 안에서 나타나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차이다. 그러나 여기, 극히 중요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참된 복음적 교제가 가능하다.
이보다 훨씬 심각한 분열이 로마 교회와 복음적 개신교 사이에 온갖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와 초기의 위대한 신조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오늘날 경건한 개신교도들은 얼마나 큰 공통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로마 교회와 우리를 갈라놓는 차이를 희미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 격차는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아무리 엄청나다 하더라도 오늘날 장로교회에 소속한 많은 목사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심연에 비하면 정말 사소하게 보인다. 로마 교회를 기독교의 왜곡이라 한다면,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혈연, 시민이라는 같은 신분, 윤리적 목적, 인도주의적 노력 등의 많은 끈들이 우리를 복음을 포기한 사람들과 묶고 있다. 이 끈들이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을 믿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봉사는 일차적으로 메시지 전파에 있으며, 특히 기독교적인 교제는 그 메시지를 모든 삶의 근거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메시지 위에 세워진 종교라는 기독교의 특징은 사도행전 1:8에 잘 나타난다. “너희가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적절하게 요약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거하는 운동이었다.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모든 자료들은 그들의 증언이 일차적으로 내적인 영적 사실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단번에 영원히 이룬 일들에 대한 것임을 너무나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에 근거해 있으며, 기독교 사역자는 일차적으로 증인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인석에 앉았을 때 중요한 것은 그가 진리를, 전체 진리를, 오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요 대적이 되는 현대의 가르침과 대비해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요점을 벗어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주요 대적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가르침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이 두 운동이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위치에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요약의 형태지만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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