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11장 공중의 새와 꽃들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8. 3. 3. 16:25

11 장    공중의 새와 꽃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6-27)

 

사람들은 음식과 마시는 것과 의복이 그들의 생활의 전부인 것 같다. 그들은 이것들을 위해 살며 갖가지 방법으로 이것들로 염려하고 근심한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시고 나서 이 문제의 각기 다른 면을 고찰하신다. 여기 본문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존과 존속과 생명 유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 이 지점에서의 논증은 작은 것에서 큰 것에로, 보다 낮은 차원에서 설정하시고 나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신다. 눈앞에 있는 공중의 새들을 그저 바라보라. 이 새들에게는 먹이가 공급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씨를 뿌리고 그것을 곳간에 모아 저장한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신 방법이다.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3:19) 사람은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러나 수확량을 증가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은 새들에게로 주의를 끄신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새들에게 먹이를 먹이시고 목숨을 부지하게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보호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사실을 가지고 이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추론을 도출하고 계신다.

첫째 추론, 공중의 새를 보라---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 하나님은 그의 일반섭리를 통해서 짐승과 공중의 새를 이와 같이 다루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 아버지께서 오직 일반섭리로만 관계되어 있는 저 새들을 이렇게까지 돌보실진대 하물며 우리에 대한 그의 돌보심은 얼마나 더 커야 하겠는가? 땅의 아버지도 단순한 생물을 위한 먹이를 공급하면서 자기 자식들을 등한히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땅의 아버지가 이러할진대 우리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더 그러할 것인가!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시다. 이렇게 하는 순간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아예 불가능하게 된다.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적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두려움은 즉시,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 주님의 특정한 진술은 하나님의 자녀들 곧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자녀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뿐이다. 성령이 그 속에 내주하시지 않는다면 그 아무도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도 없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이런 관계에 있다면, 여러분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죄가 됨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둘째 추론,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이것은 사람의 특히 그리스도인의 참 위대함과 그 품위로부터 도출한 논증이다. 성경의 교리 중 인론 곧 사람의 위대함과 존엄성에 관한 이 강조보다 더 괄목할만한 것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위대함을 논하며, 성경과 그 가르침은 인간성을 천대하고 비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참된 위대함은 성경의 인간관이 약화됨에 따라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참 위대함과 존엄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여러분이 사람의 위대함을 볼 때는 우리 주님을 볼 때인 것이다. 그분은 비천하고 낮은 모양으로 오셨다. 그 분은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어졌지만 우리가 사람의 존엄성을 보는 것은 이곳이지 왕궁에서가 아닌 것이다.

세상은 위대함과 존엄에 대해 거짓된 관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참된 인간관을 발견하려면 성경으로 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상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러면 작은 것에서 큰 것에로 진행해 나가는 이 논증의 적절함을 볼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로 보심을 기억하라. 그리고 단번에 영원히 이런 것들에 대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 ‘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에서 높이의 의미와 생명의 길이의 의미가 있다. 문맥으로 보면 이 말은 생명의 길이를 말씀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cubit)18인치이다. 여러분은 키를 18인치나 더하기 위해 염려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염려하는 그들은 몸에 필요한 것으로 염려하며, 결국 수명을 연장하고 싶어한다. 주님은 여기서 이 세상의 우리 목숨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면해라. 너희의 모든 행위로 너희의 노력으로 너희의 모든 수고와 근심 걱정을 가지고 너희 중 어느 누가 한 순간이나마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이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잘 잊는 사실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실이다. ‘돈이 힘이다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백만장자도 생존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비참한 가난뱅이보다 우월한 점이 없는 것이다. 의학지식과 기술로도 목숨을 연장할 수 없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같은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환자가 동일한 치료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회복되고 한 사람은 죽는다. 그 해답은 아무도 수명을 한 치도 보탤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현대의 온갖 지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왜 이렇게 법석을 떨고 안달하느냐, 왜 이렇게 흥분하고 왜 이렇게 근심하고 걱정하느냐고 주장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근심하고 걱정하게 되거든 즉시 자세를 바로 잡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삶을 시작하거나 계속하거나 끝낼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전적으로 그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큰 문제가 그의 관리 하에 있다면 이보다 덜한 것들을 그에게 일임할 수 있다이런 일들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철저하게 헛되고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임을 인정하라. 여러분의 할 일이나 하라. 씨 뿌리고 추수하여 곳간에 거두는 일을 하라. 나머지는 하나님 손에 있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어떤 상황에도 적용된다.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30)

 

몸과 의복의 문제이다. 백합화는 팔레스타인의 들의 평범한 풀들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풀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직조도 아니한다. 그러나 이 풀들의 그 경이와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보라고 하신다. 꽃에는 그 형태와 무늬와 짜임새와 색깔에 있어 사람이 온갖 재간을 갖고도 모방할 수 없는 본질적 자질이 있다. 이 세상에서 짧은 생존기간 동안에 아무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들판에서 헛되이 향기를 내는 작은 꽃일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옷 입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얼마나 강력한 논증인가! 풀들은 베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 오늘 그 섬세한 미와 온갖 완전함을 지니고 있으나 내일이면 모두 가버린다. 그러나 여러분은 불멸이다. 여러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영원에 소속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영혼을 심어 놓으셨다. 사람은 죽도록 되어 있지 않다. ‘너는 흙이라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은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다. 여러분은 생래적 존엄과 위대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음과 무덤 너머에 영원한 실존을 지니게 된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믿을 때 여러분을 만드시고 여러분을 이와 같이 작정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분의 몸을 소홀히 하시리라 믿을 수 있겠는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