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8 주일설교
본문: 갈 4:19
제목: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1. 아담은 인류에게 아담의 형상을 물려주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알려면 아담의 형상을 알아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타락하였고,
그 결과 인류에게 그의 형상을 물려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셋이라 하였고”(창5:1-3)
아담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 값으로 사망이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 이르렀느니라”(롬5:12)
그 죄와 사망의 법의 굴레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창5:5)
홍수로 멸하시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남기셨고 인류가 다시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아담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법의 적용을 받는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에 인류는 그 안에서 함께 죄를 지었다.
원죄를 물려받아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죄 없음으로 선언)을 받고 구원을 받음으로
아담의 형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옷 입게 된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처음 창조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재창조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저 교회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형상을 벗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새로 옷 입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다. (엡2:1-8)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마귀의 자녀이다.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
그 자는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곧 사탄이다.
그 영은 우리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게 하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게 한다.
구원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영을 살리시는 것이다.
우리의 좀 더 나은 행실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이루어진다.
구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고,
또 함께 일으키시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것이다.
아담의 형상을 입고 태어나는 인간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사탄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탄에게 육체와 마음이 사로잡혀 그의 뜻을 따라 살 뿐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4:19)
그리스도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독생자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1:3)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 것을 알 수 있다.(고후4: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는 믿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와 마음에는 여전히 아담의 형상이 베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고 중심인 영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고,
그 육체와 마음의 습관들은 그 형상으로 성령을 힘입어 우리 보고 처리하라 하신다.
우리의 성품과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루는 것이 성화이고 성숙이다.
수건처럼 우리를 덮고 있는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며 살면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변화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변화이고 성숙이다.
아담의 형상으로 베어 있는 우리의 성품과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이를 위해 하나님은 광야 생활과 그 연단과 훈련을 배열하셨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신 후에는,
우리를 인도하셔서, 그 위험하고 광대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신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사는 훈련과 연단을 하신다.
광야 생활 중에 일용할 떡은 항상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공급하신다.
일용할 만나를 공급하시고 반석에서 생수도 공급하신다.
옷이 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신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아들을 안음 같이 안아서 그 광야 길을 통과하게 하신다.
그래서 마침내는 복을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
그 풍성한 영광의 기업을 주시고, 그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이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품과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없는 것을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주시고
그 형상으로 우리의 성품에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나타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성품에서 풍기고, 삶에서 일상생활에서 풍기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아담의 형상을 지우는 만큼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성품 가운데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담의 형상인 옛 사람의 사고방식, 가치관들을, 말씀으로 깨닫고, 기도로 성령을 힘입으며,
물로 씻어내듯 불로 태우듯 하나 하나 씻어내고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면,
고난의 과정들을 인내하고 인내를 통해 아담의 형상들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구석구석 이루어 가야 한다.
중요한 것이 우리의 성품이다. 성품이 이루어지면 삶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았는지, 아담을 닮았는지, 매일 돌아보면서 이 연단의 작업을 해야 한다.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해야 한다.
그것이 변화와 성숙을 낳고 축복과 영광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성결이요 거룩이요 완전이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하신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다.
탐심과 야망은 사망과 멸망을 부를 뿐, 축복과 영광을 이룰 수 없다.
축복과 영광은 거룩함의 산물이지, 원하고 달음질함의 산물이 아니다.
아담의 형상으로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얻는 것은 파멸과 멸망일 뿐이다.
아들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우리의 영혼은 구원 받는 순간, 이미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영혼인 것을 감사해야 한다.
사탄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 우리를 망치고자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육신의 생각, 이론들 지식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의 성품과 삶에 이루는 것은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작업이기에
해산하는 수고가 따른다.
왜, 우리의 성품과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우리가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산이 무엇인가?
아기를 낳아 본 여자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 고통과 희생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는 다 미루어 알고 있다.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속에 이룰 수 없다.
해산과 형상과의 관계를 우리는 숙지할 필요가 있다.
해산의 수고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어코 이 일을 우리를 통해 수행하신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의 축복과 영광의 기업이 이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원한다고 그것들만을 다 주었다가는 자식을 망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는 우리의 질그릇 안에 가졌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주시지만, 우리는 싸이지 않는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형상)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고후4장)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다.
다윗은 그래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은 다 한결 같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였다.
해산의 수고 없이 거저 된 사울과 솔로몬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다.
고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해산의 수고는 그리스도인의 필수 과정이다.
믿음과 인내의 세월이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니다.
모세는 나이 40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큰 일을 할려고 결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의 광야생활을 겪게 하셨다.
그 40년 동안은 버려진 것 같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세월 같았다.
그러나 나이 80, 때가 찼을 때, 모세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모습(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120세까지 40년 동안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았다.
나이 열 일곱에 하루 아침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13년 동안의 고난의 세월, 노예살이, 억울한 감옥살이는 무익한 낭비 같았다.
그러나 그 13년은 믿음과 인내로 요셉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였고,
나이 30에 애굽제국의 총리가 되고, 이후 80넌 동안 110세까지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
우리가 해산의 수고를 말씀과 기도로 솔선수범한다면,
매일 우리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훈련과 연단은 훨씬 경감될 것이다. 그 기간도 자연 짧아질 것이다.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다.
이미 그 수고를 했지만 아담의 형상으로 돌아가고 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고
그 수고를 마다 하지 않고 다시 또 하겠다는 것이다.
목자는 목자 대로, 성도는 성도 대로 해산하는 수고를 반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아담의 형상으로는 평강과 형통을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성품과 삶에 이루어질 때,
천국도 이루어지고, 축복과 영광도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더욱 좋아질 것이고 하는 일들도 더욱 형통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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