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신약성경의 나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한 실책이다. 예수의 부활 문제를 논하면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어떤 사람의 부활을 증명하면 되는 것처럼 말한다면 실책이 된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어떤 자연주의적 설명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기적의 증거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역사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엄청난 적대감이 있다. 예수는 매우 비상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독특성으로 인해 기적에 대한 적대적 가정은 제거된다. 보통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은 극히 예외적이지만, 예수는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154
신약성경의 기적의 증거는 다른 방법으로도 지지를 받는다. 바로 적절한 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적의 목적이 밝혀진다면 기적의 증거는 훨씬 강력해진다. 전체적으로 기적이 일어나야 할 합당한 이유를 발견하면, 그 기적들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의 기적의 경우 그런 적절한 이유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죄를 정복한다는 사실에 그 이유가 있다.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으며, 우리 성품의 전체적인 타락이 그 두려운 형벌의 일부다. 실제적인 범법 행동이 이 악한 뿌리에서 나오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책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매우 심오하고 삶의 현실에 매우 합당한 이 견해를 근거로 볼 때, 자연적인 어떤 것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자연은 끔찍한 결함을 전수할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에서만 소망을 찾을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이- 그렇게도 신비하고, 그렇게도 모든 기대와 어긋나며, 그러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된 그 하나님의 성품에 너무나 어울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발견된다. 죄 있는 인간이 내놓는 어떤 것도 두려운 죄책감에서 사람을 구속하거나, 죄 있는 인류를 죄의 진창에서 건져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한 구속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뿌리가 있고, 초자연성이 기독교 신앙의 근거요 본질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초자연성을 받아들이려면 죄의 현실에 대한 유죄선고를 받아야 한다. 그것 없이는 예수의 유일성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의 죄성을 예수의 거룩성과 대비시킬 때만이, 우리는 예수를 나머지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그 간격을 인식한다. 죄에 대한 유죄 선고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없다. 죄로 인한 찔림이 없이는 구속의 기쁜 소식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들린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에 대한 유죄의 선고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성적 사고를 통해 신앙에 도달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나는 사람이므로, 나도 죄인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죄로 인한 찔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참된 찔림은 그것보다 훨씬 직접적이며,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에 의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의 계시에 의존한다. 인간의 보편적 죄성에 관하여 성경에 밝혀진 것이 무서운 사실이라는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온 그 계시에 첨가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곧 온 정신과 마음의 확신, 자신이 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깊은 깨달음,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키는, 죽은 양심에 비취는 빛이 곧 그 계시다.
사람이 그 경험을 통과하면 그는 이전에 자기가 어떻게 그토록 눈이 멀었었는지 놀라게 된다. 특별히 신약성경의 기적에 대한 이전의 태도, 거기 계시되어 있는 초자연적 인물에 대한 이전의 태도에 대해 놀라게 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랑하게 된다. 자연적인 어떤 것도 그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가 추락하면서 세상이 한번 요동치고, 그가 구원을 받으면서 다시 한번 요동쳐야 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초자연적 인물은 결코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유주의의 가정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은 절대로 역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신약성경의 예수에 대한 서술 가운데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분리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제거하고 자연적인 것만을 유지해야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리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도는 많았지만- 현대 자유주의 교회는 온 정성과 영혼을 기울여 노력했고, 그 결과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이 “역사적 예수의 연구”보다 더 빛나는 장이 기록된 적이 없다-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문제는 이것이다.
기적들은 신약성경의 예수 이야기에 비정상적으로 붙은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날실과 씨실인 것이다. 기적들은 예수의 고상한 선언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적들은 의심할 수 없는 그의 성품의 순결성에 의해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세상에서의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현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기적들이 거부되고 있으며, 기적과 함께 우리 주님의 초자연적인 존재도 전적으로 거부된다. 거부되는 것은 몇몇 기적이 아니라 모든 기적이다. 초자연적인 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놀라운 많은 일들을 단순히 전설 혹은 신비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만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저런 기적의 역사성이 아니다. 문제는 모든 기적의 역사성이다. 이 사실이 자주 흐려지고 있으며, 이런 사실에 대한 모호함이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을 부정직한 방법으로 변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유주의 설교자가 하나의 기적을 뽑아낸 후에 그것이 망치 유일한 문제인 양 그 기적에 대해 논의한다. 일반적으로 뽑히는 기적이 동정녀 탄생이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들어올 때 취한 방식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든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는 그리스도와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명백하게 일치한다.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신약성경의 초자연적인 내용 전체를 거부하며, “부활”을 그 단어가 전혀 의미하지 않는 것, 곧 예수의 항구적인 영향력, 혹은 무덤 저편에 있는 예수의 정신적 실존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래된 단어들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실제 내용은 사라졌다.
제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교회의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예수의 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무덤에서 이미 살아나왔다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종교의 핵심이요 영혼이 된다.
문제는 전체 기적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구주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다. 기적을 거부하면 당신은 예수에게서 인간성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볼 것이다. 그러면 부활은 환각이 될 것이다. 기적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고난을 받고, 하나님이 능력에 의해 사흘 만에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구주를 소유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견해 사이의 차이는 전혀 다른 두 종교 사이의 차이다. 지금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적절한 시기다. 지금은 전통적 용어들을 오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를 그치고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기에 적절한 시기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며 자유주의 교회와 함께 예수를 거부할 것인가?
자유주의 설교자도 때로 “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듣고 보통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 설교자도 우리 주님의 신성을 믿는다고 한다. 그의 비정통주의는 세부사항에만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를 반대하는 것은 속 좁고 무자비한 이단 사냥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언어는 오직 생각의 표현으로서만이 가치를 가진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중요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거기에 덧붙여진 의미 때문이다. 자유주의 설교자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떠올린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분되는 인격이 아니라 세상에 스며 있는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에게서 특별히 선명하게, 혹은 특별히 풍부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런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또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인간이 욕망하는 지고의 대상, 사람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맘몬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맘몬을 위해 일하며, 맘몬에 그들의 마음이 집중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로 자유주의 설교자는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우주의 창조주와 통치자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중 하나이며,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람- 우리가 아는 최고의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일신교보다도 더 기독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초기의 일신교는 최소한 하나님을 믿기는 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 자유주의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에 대해 높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극히 낮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교회들 내에 있는 자유주의 신학은 일신교보다 열등한데, 무엇보다 정직성에 있어서 그러하다.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주의 교회 내에 자리를 유지하면서 보수주의적 동료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계속해서 이중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설교자는 언어의 근본 원칙에 역행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언어란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에 붙이는 의미가 사실과 부합할 때에 진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일으키고자 하는 의미가 사실과 부합할 때 진실해지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상식적인 정직성을 폐기하지 않는다.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는 어떤 의도라고 해도 거짓말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과 모든 참된 기독교에서 예수는 단지 신앙을 위한 모범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예수는 대상으로 하는 신앙은 종교적인 신앙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예수에 대해 가지는 확신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확신이다. 예수에게 맡겨지는 것은 다름 아닌 영혼의 영원한 복락이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예수를 향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분명히 우리 주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다.
각각의 주장들은 이 중심적인 전제에 비추어 다뤄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언하는 각각의 구절들은 신약성경에 첨가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동일한 근본적인 개념의 자연적인 결과다. 그 각각의 구절들은 어떤 한 권의 책이나 일군의 책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서신들에서는 특별히 명백하게 나타난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반복해서 오직 아버지와 아버지의 성령과만 관계된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도 그 구절들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거의 그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의 증언도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증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가 나의 아버지, 그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방식-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27(눅10:22)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 곧 성부와 예수의 관계를 표시하는 이 방식은 공관복음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우리 주님의 신성을 단언하는 표현 방식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 인물은 영원한 하나님과 신비한 연합 속에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동일하게 분명한 말로 예수를 한 사람으로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엄청난 말을 하고서 주님의 신성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면서도, 예수가 우물가에서 지치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목말라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우리 구주의 인성을 입증하는 극적인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공관복음서에는 그만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공관복음서 저자들 역시, 진정한 인간의 삶을 살았고 그 자신이 진정한 인간인 하나의 인물을 그리고 있다.
사실 신약성경의 증언은 어디서나 똑같다. 신약성경은 어디서나 하나님이요 사람인 한 인물을 제시하고 있다. 이 증언의 어느 한편을 제거하고 나머지 한편만을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주님의 완전한 인성을 거부했지만, 그 결과 신약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을 갖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혼합되어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교훈으로부터 이보다 멀리 떠난 교훈은 없을 것이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신성과 인성을 분명히 구분된다. 신적 본성은 순전히 신성이고, 인간적 본성은 순전히 인성이다. 예수는 구별되는 두 본성을 가진 신이요 인간이었다. 반면에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 안에 두 개의 다른 인물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런 영지주의적 견해는 성경의 기록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우리 주님의 인격의 통일성을 명확하게 가르친다.
이런 오류들을 제거하고 교회는 두 본성이 한 인물 속에 있다는 신약성경의 교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예수는 “서로 구별되는 두 본성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이면서 영원히 한 인격자다.” 두 본성 교리가 참이든 거짓이든, 그것은 분명 사변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요약하려는 시도 속에서 생긴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당연히 이 교리를 거부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주님의 모든 고귀한 본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주의는 과거의 이단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초자연적 요소들이 제거된 후에 남는 예수는 고작해야 매우 어렴풋한 인물이다. 그들이 순전히 인간적인 예수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이렇게 재구성된 예수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이 예수는 그 존재의 중심에 도덕적 모순, 곧 그의 메시야 의식으로 말미암은 모순을 가지고 있게 된다.
오늘날 예수를 심리학적으로 재구성하여 되살리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예수는 무대에서 만들어진 인물로 남는다. 신약성경과 위대한 성경적 신조의 예수는 자유주의자의 예수와 전혀 다르다. 그 예수가 신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인격의 신비를 누가 헤아릴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신비는 사람이 거기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신비다.
신약성경의 예수는 오늘날 재구성된 예수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낫다. 곧 그가 참되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원리를 지지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인물이다. 모든 기독교 시대를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이상한 일은, 그를 역사의 페이지에서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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