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John Owen, 1616-1683)
-1616년 영국 옥스퍼드 주 스타드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2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9세에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
-옥스퍼드 그리스도 교회의 감독과 옥스퍼드 대학교 부총장을 지냄.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개혁주의 3대 신학자로 불림.
-말년에는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
-‘죄 죽이기’(롬8:13),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롬8:6)
《저자의 말》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제 자신이 이 세상 가운데서 더 이상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때에 깊이 묵상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상 중에 있던 저의 힘을 회복시켜 주셨고, 저의 영혼은 한없는 유익과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이러한 묵상이 모든 신앙고백자들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확신 아래, 많은 회중들에게 이 묵상의 주제를 강론하게 되었습니다(1676년에 완성).
저는 두 가지의 사역 원리를 목회 사역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 개개인이 하늘을 묵상함으로 누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고,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시험의 때에 그들에게 특별하게 요청되는 영적인 도리들을 강권하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 전체를 선언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불분명하게 싸우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막연히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시험의 때에 연약한 그들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하는 시험이 무엇인지, 시험 가운데에 있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목회 사역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그러한 원리 아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긍휼어린 심정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 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들 역시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은 두려운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말씀이 누구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이 가지는 거룩한 사명과 권위가 무엇인지 잊지 말고 모든 사역이 복된 열매로 거두어지기를 겸손히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강론을 통해 성도들에게 의도하는 바는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본 강론을 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에 대한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 안달하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자기의 정신으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만약 세상이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를 온전히 자기 방식대로 장악하여 마음속에 굳건한 요새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열매는 오직 영원한 파멸뿐인 것입니다.
갈수록 흉흉한 상태에 빠져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견고했던 수많은 기초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세상의 일들로 분주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다양하고 풍부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조금이라도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면, 영적인 일들을 하기 위한 마음의 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세력에 우리의 마음이 장악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생명과 평안에 이르는 영적인 생각의 은혜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우월한 애정을 가지고 부단하게 묵상함으로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구도 세상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세상의 모습들이 얼마나 합당하지 않는 지를 바르게 깨닫는 일이 긴박하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저는 본 강론을 통해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세상적인 마음과 사고의 구조에서 그들의 영혼이 하루 속히 벗어날 것을 촉구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이 가진 죄악성과 영적인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게 할 것입니다. 또 이 악한 마음의 성향이 심령을 장악하는 여러 가지의 과정과 방편들을 숙고해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할 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의 생각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생명과 평안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들을 강권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 강론이 가지는 목적과 의도입니다.
Ⅰ. ‘영의 생각’의 정체
1장 로마서8:6의 이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이 본문은 서로 대칭 되는 두 가지 전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어부에 ‘육신’과 ‘영’, 술어부에 ‘사망’과 ‘생명과 평안’을 서로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주어부인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인류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는 예외 없이 그 둘 중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두 가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곧 한 사람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동시에 거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사람 속에 서로 대립되는 정반대의 성향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성향이 각각 구별되는 별개의 상태를 따로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그 둘 중 어느 것이든지 영혼 속에서 더 우세하게 되면 영혼의 상태를 그 우세한 세력이 주장하여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만들어 냅니다.
사도는 서로 다른 두 성향이 만들어 내는 상태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에 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8절). 그들은 “육신을 따르는 자들”이며(5절), “육신대로 사는”자들이며(13절), “육신을 따라 행하는”자들입니다. 그와 다른 이들은 “영 안에 있는 자들”이며(9절), “영을 좇는 자들”이며(5절), “영을 따라 행하는 자들”입니다.
전자(前者)가 바로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이며, 후자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둘 중 하나의 상태에 속해 있기 마련입니다. 육체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든지,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는 이 다른 두가지 상태를 가져오는 원리들과 그 작용의 결과로 열리는 열매들과 효과들을 통하여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도는 그 열매들과 효과들을 그 두 전제의 술어부(述語部)를 통해 표현합니다. ‘사망’과 ‘생명과 평안’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절대적인 형벌로서의 이 사망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영적인 사망’은 공식적(formal) 죽음이요, ‘영원한 사망’은 ‘응분에 합당한 대가적’(meritorious)죽음입니다. ‘공식적인 영적 사망’이라 함은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이들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엡2:1).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 영이 죽어 있는 상태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엡2:3). 그들은 형벌적으로 영적 죽음의 세력 아래 있습니다. 그 사망은 응분에 합당한 영원한 대가를 치르는 죽음입니다(영원한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그리고 사도는 다음 구절(7절)에서 육신의 생각이 당하는 끔찍한 선고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이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영’(Spirit)이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의 영혼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롬8:9)과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에서 ‘영’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격 자체’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모든 자들 속에서 작용하는 ‘영적 생명의 원리’(principal of spiritual life)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이 로마서 8:6에서는 ‘영’이라는 명사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로 난 자들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원리’를 말합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려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영혼 속에 일으키시는 새로운 ‘순종의 거룩하고 생명 있는 원리’가 그것입니다.
그에 반해 ‘육신’은 그것이 가진 본성과 활동과 작용의 차원에서 ‘영’과는 정반대입니다. 모든 악한 행동들을 유발시키는 타락한 본성이 가지는 부패의 원리를 가리켜 ‘육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롬8:1,4,5).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의 부패한 정서를 ‘육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프로네마’에서 파생된 ‘프로네시스’라는 말은 이지(mind:理智)의 활동과 작용을 말합니다. 곧 이지가 가진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분별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습관적인 마음의 행로나 정서의 성향을 움직이는 이지의 작용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을 보면, ‘마음에 깊이 두다’, ‘애착을 갖다’의 의미로 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곧 어떤 것들에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집요하게 달라붙을 정도의 애착을 가진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따라서 ‘영의 생각’ 또는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이지와 정서의 모든 실천적 행사로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그 영적인 일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그 영적인 일들에서 맛과 풍미를 느끼며, 거기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기까지 나아가려는 모든 작용, 바로 그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이지가 영적 생명과 빛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져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합니다. 그로 인하여 그 이지가 부단하게 작용하고 감화를 받아 영적인 것들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영적인 것들 안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생각이 이지의 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이지의 실제적인 행사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소원하는 이지의 실제적인 활동입니다.
(2) 이지의 성향과 구조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지가 모든 정서를 동원하여 영적인 일들을 고집하고 애착을 가지는 성향입니다.
(3) 이지의 만족
이것은 이지가 영적인 것들 속에서 달콤한 맛과 풍미를 발견하고, 체질이나 성향에 그 영적인 것들이 아주 잘 들어맞는 데에서 오는 만족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의 생각’ 속에서 일어납니다. ‘영의 생각’ 속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도리의 초석(礎石)은 정서, 곧 신령한 것들에 즉각적인 애착을 가지는 정서 속에 있습니다. 이지가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이 바로 그 정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론의 기초 본문이 되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진리들을 지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첫째,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은 모든 거듭나지 않은 이들과 참 신자들을 구별하는 큰 특성이다’. 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육신에 속하여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모든 자들은 거듭나지 못한 이들,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둘째, ‘영적으로 생각하는 곳에서만 생명과 평안이 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진리의 권능에 순복하여 우리 영혼이나 양심이 늘 감화를 받게 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생명과 평안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익입니다.
오늘날 정말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그저 지적으로만 인정하고 찬동할 뿐, 정작 그들의 양심은 그 진리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리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과 조건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믿고 있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단 한 음절의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말씀의 진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진리에 비추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믿는 자라면 마지막 날에 그 진리가 자기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찾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의 처한 영적인 상태와 조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3-24).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주목하면서 자기들의 상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이내 마음의 생각은 엉뚱한 일들에 다시금 사로잡히고, 말씀으로 알게 되었던 자기들의 영적인 실상에 대한 각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진리의 말씀의 세력 아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진리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세상적으로 가지는 모습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생각이 그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육신적인 생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아닙니다. 모든 생각의 ‘원리와 뿌리’가 육신에 있습니다. 육신적인 이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코 ‘생명과 평안’에 이를 수 없습니다(빌3:19, 요일2:15-16).
이것은 영적인 생각 체계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땅의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세하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로 불리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그 정반대의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규칙적으로’ 이따금씩 땅의 일들에 애착을 가지는 방식으로 마음을 쓰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생각이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다시금 영적인 것에 마음을 온전히 돌리려면 분명 그러한 죄악적인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것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할 영적 목표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잠시나마 가지는 그러한 생각을 ‘세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영적인 은혜는 넘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설령 은혜의 빛이 요구하는 최상의 영적 수준에 이르는 일 자체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그 일을 위해 부단히 애쓰려는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생각이 육신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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