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하나님을 묵상함(1)
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써야 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절대적인 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충만’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의 최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각들은 결코 영적일 수 없습니다(벧전1:21).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10:4)는 것은 주제넘고 건방진 악인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악인들의 사상 속에는 하나님이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때로 하나님이 계신 것은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법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결코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래 지금처럼(17세기) 뻔뻔한 무신론이 흘러넘치는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원리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교리를 인정하고 고백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모든 것은 다 거절하다니요! 이 일은 복음의 빛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해가 갈수록 복음적인 예배의 도리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냉담하고 게을러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을 아예 보지 않기로 결심한 자들처럼 보입니다. 마치 빛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 비춰지는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빨리 눈을 감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과 악에 대하여 보응하실 재판장이 살아 계시다는 개념은, 마음속에서 제거하고 싶은 개념 중 가장 첫 번째일 것입니다.
그들 중에 위험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자신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자들 가운데도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의 일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도리는 단지 의무일 뿐입니다. 어떤 특별한 기회가 주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오직 세상의 일들만을 생각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가지고 누리고자 소원하는 욕심을 위해 모든 기력을 모두 소진합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는’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혹 거짓된 것이 아닌지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진실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기쁨이며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롭고 능력 있는 일, 은혜롭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여러분이 가져야 하는 기쁨의 가장 주된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근거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 어떤 고통과 불안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념하고 감사하십시오. 무한하시고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정말 이러하신 분이라니!’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우리가 참예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기 시작 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그러한 생각들과 묵상들을 통하여 마음을 연단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더 시급하고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생각과 묵상을 통하여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 모두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의 정서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수시로 점검하는 일을 하도록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념하면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됨됨이 때문에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 우리의 생각들과 정서의 애착을 효과적으로 떼어내는 방편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영적인 관점에 집중할수록 세상에 속한 것들이 모두 지나가고 사라질 가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우리가 더욱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은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묵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바라며 소원하게 할 것입니다. 썩어질 육신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며 영원한 안식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갈망은 더욱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더욱 민감하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지각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에 대한 언약을 언제나 새롭게 상기할 수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을 생각하며 즐거워할 수 있게 합니다.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언약을 생각하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달콤하고 새 힘이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영적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아는 바른 지각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높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머무는 시간을 지속시키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영혼의 존중심’의 증거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지혜 전부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영적인 의무들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충만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9장 하나님을 묵상함(2)
이제는 영적으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되려면 무엇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우리 생각들 속에서 무엇을 항상 친밀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심’을 많이 생각하십시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의 모든 기초가 바로 그 요점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점이 ‘믿음의 제일 대상’입니다. 또한 이성(理性)이 취할 ‘첫 동작’(first act)이요, 기독교의 오직 유일한 초석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따금씩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삶 자체에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로는 믿는 않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개념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면에서나’ 무신론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의 생각들을 더욱 풍성하게 해야 할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봅니다.
첫째, 저주 받을 지옥의 효력을 대적하여 특별한 증거가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가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넘쳐 있는 무신론적인 불경건의 원리들이 모든 경건한 이들의 영혼을 격동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들을 자주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무신론적인 사상들 속에서 힘을 내거나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시험들로 넘쳐납니다. 옛 시편 기자는 불신앙적인 시험에 빠질 뻔한 자신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이 그들에게는 없나니”(시73:2-5).
우리에게도 그 시편 기자가 당했던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야 할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때 시험의 폭풍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확고히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각할 때 괴로움을 겪을 수 있는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감안해야 할 일은, 사탄이 우리 마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에 매우 연약함을 압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켜 새 힘을 얻게 하려 할 바로 그 때, 사탄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상상’들을 주입하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엡6:16에서 언급한 ‘악한 자의 불화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럴 때에 믿음으로 대처할 방식을 사도가 말합니다. 믿음은 가장 먼저 ‘그러한 사탄의 혐오스러운 제안들을 신속하게 거부하도록’ 작용합니다. 마귀가 던지는 불화살의 효력이 아주 잠깐이라도 여러분 속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옷에 불똥이 튄다면 여러분은 주저하지 않고 재빨리 털어버리지 않습니까? 누가 옷에 튄 불똥을 여유 있게 바라보면서 과연 ‘이 불똥으로 인해 내 옷이 탈까’라고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마귀가 던지는 불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러한 불화살이 잠깐이라도 있도록 내버려 둔다면 여러분의 상상은 시험의 화염으로 큰 소동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그러한 것들을 즉시 물리치십시오. 우리 구주께서 하신 것같이 말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하나님의 신격에 대한 증거와 체험이 있습니다. 그 체험으로 즉시 대적하십시오. 하나님이 없다는 암시를 던지는 사탄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하는 너의 암시와는 정반대의 체험과 영적인 지각이 내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라고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고치심으로 보게 된 사람을 시험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소경이었던 그는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사탄에게 확실한 사실을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죽어 있었으나 지금은 살았다는 사실과 영적으로 눈멀어 있었으나 지금은 본다는 사실을 말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그 사실과 체험을 말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갈피’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은 너무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사실에 압도당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중단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마치 태양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무한하심을 생각하다가 마음을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있는 자들에게는 두 가지의 충고가 필요합니다.
먼저, 지성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거룩하게 여기고 감탄하는 쪽으로 자신을 몰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가운데 속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탁월하심을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관심을 가지신 그 전능하심이 발휘하는 효력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는 우리가 지성으로 이해하기에 너무나 높고 위대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효력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쁘다’, ‘사업상의 일이다’,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기억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망각한 채 말입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 난잡하게 참석하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들로 자신의 심령을 부단하게 깨우치지 않는다면, 결코 죄악적인 함정들과 비행에서 자신들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혼자 외로이 칩거하는 때’는 영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정말 어려운 시험의 때입니다. 문득 허망한 생각들과 어리석은 상상들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 본래의 정서와 생각들은 정욕과 부패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이 영혼을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 가운데서 지켜내고 그 마음의 정서들로 하여금 해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지 알도록 할 것입니다.
큰 어려움과 위험이 닥쳐와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아무도 그 곁에 있지 않았을 때가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분노를 발하며 그를 죽이고자 했던 여러 임금들과 주관자들과 재판관들 앞에서 사도는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생각을 떼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전능하심에 마음을 고정시켰습니다. 큰 어려움과 위험으로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극한 공포 속에서 작은 희망조차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 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는 그 둘을 하나로 연합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롬1:20). 경외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 믿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작용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 안에 견고히 서있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숲의 나뭇잎처럼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해도 죽음은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오면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 지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과 이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잠깐 스쳐가는 세상의 일들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위안과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받으시고, 흙 속에서 우리 몸을 일으키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충실히 외적인 의무들을 이행합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만 행해지는 영적인 의무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정서와 생각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일도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영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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