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배운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가져오신 생명은 참으로 새로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고 있다. 이것은 특히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중대한 교훈이다. 기독 신앙의 가장 큰 원수는 종교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주님의 시대에도 그랬다. 사복음서는 이 무서운 사실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후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 거듭남은 새 창조가 일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열다섯 번째, 거듭난 자는 의를 사랑한다. 종교의 관심은 항상 도덕에 국한되어 행동에 관심을 갖는다. 종교가 결국 무익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내면을 보지 않는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인격의 결을 속속들이 살피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의 삶과 행동도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겉모습과 ‘어떻게 보일까?’에만 신경을 쓰고 자신은 거의 잊고 지나간다. 도덕이나 종교는 특정 잘못을 범하지 않는 데만 관심을 갖는 완전히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 점에서 종교는 진리의 원수이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광이 여기 있다.
주님은 이것을 팔복의 하나로 제시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6) 참으로 복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의를 원한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4:17에서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어떤 고기를 먹지 않느냐, 어떤 음료를 마시지 않는냐가 그리스도인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독실한 종교인이나 도덕적인 종교인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와 행동과 행위만 교정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 –적극적인 의- 와 희락과 평강”이다. 단순히 독실한 종교인은 특정 잘못을 범하지 않는 데 관심을 두며 거기 만족하는 자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 적극적으로 거룩해지고 싶은 큰 열망과 갈망을 느낀다.
이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① 시금석은, 요한은 요일5:1-3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들에게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는 중대한 교리를 배우고 그 교리를 실천하라는 요청을 받으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초상을 본다.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그런 삶이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이 편협하게 느껴지는가? 기질에 맞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다.
특히 독실한 종교인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 느낀다. 그래서 종종 계명을 재조정하여 자신들에게 편하게 맞추려 든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이 아닌 외면이다. 그들에게 계명은 일종의 ‘멍에’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종의 장애물이자 율법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율법은 항상 무겁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이 아닌 생명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의 생명을 얻은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시1:2),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무거울 수가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는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싶어 한다. 이 삶의 영광은 항상 인격적이라는 데 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입법자가 아닌 아버지로 여긴다. 규칙과 율법과 규범이 아닌 인격적인 관계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은 필연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하나의 관점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규범을 채택하거나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다. 우리 안에 생기는 생명으로서 반드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성경이 결국 제시하는 요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참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전적인 목적이 우리를 의롭게 하려는 데 있음을 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1-14) 하나님이 소유하신 백성의 특징은 죄책과 형벌뿐 아니라 ‘모든 불법에서’ 속량받고 깨끗해져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 인간은 완벽하게 –의롭게- 창조되었다. 구원은 인간을 그 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죄 사함으로만 만족할 수 없음을 바로 깨닫는다.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자 죽으셨다.
확실한 사실은 이 새로운 생명 안에 거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도, 의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분명한 기초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의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이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은 계속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졌고 그 기초는 의에 있었다.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그 의를 잃고 말았고, 인간이 자기 본성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 다시 교통하게 하려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이것이 화목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이다. 단지 율법의 측면에서만 화목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다시 알고 교제하고 교통한다는 측면에서 화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상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상태와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을 친밀하게 안다는 것이다.(요17:3) 뜻이 같지 않으면 교제할 수도, 교통할 수도, 동행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므로 그와 교통하길 열망하는 자는 당연히 그 교제와 교통을 누리기 위해 의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의롭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도 그처럼 의로워지길 열망하게 된다.
여러분은 실제로 행복해지는 데 관심이 있는가, 거룩해지는 데 관심이 있는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의를 추구하고 있는가? 이것이 이 영역에서 궁극적인 시금석일 것이다. 체험의 측면에서도 마귀는 체험과 황홀경과 감정과 흥분 등에 온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굉장한 체험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인가? 의와 거룩함인가, 체험인가?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날 죽이실지라도 그를 사랑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금석은 다른 모든 시금석을 능가하는 시금석이다. 세상 어떤 것보다 의를 주리고 목마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② 또 다른 시금석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성령의 열매가 그 증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열매는 제조할 수 없다. 진짜 열매인지 인공 열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라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진짜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절로 맺히는 것이다. 생명의 표출이요 본질의 표출이다. 속에서부터 맺히는 것이다. 종교와 기독교의 전적인 차이가 여기 있다. 독실한 종교인은 인공적인 크리스마스트리와 같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의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사랑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이 기쁨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독실한 종교인에 불과하다. 이 기쁨은 시련 속에서도 즐거워하게 한다. 환경이나 형편에 좌우되는 기쁨은 쉽게 흔들리며, 조만간 말라 버린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니다. 거듭난 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자기 속에 있음을 안다.
다음 열매는 ‘화평’이다. 다음에 나오는 열매는 ‘오래 참음’, 남을 대하는 태도에 나타나는 특질이다. 강한 사람일수록 부드러운 법이다. 참으로 강한 사람만 참으로 자비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양선’이다. 단순히 잘못을 범하지 않는 데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충성’은 신실한 것, 믿고 신뢰할 만한 것을 가리킨다. ‘온유’는 짐짓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절제’는 자기 통제, 자기 훈련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순히 규칙과 규범의 준수에 기초한 훈련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훈련이라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은 자기 방식대로 훈련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통제한다. 단순히 무언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무언가가 되었음을 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자기를 통제하고 훈련한다.
참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 주시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가 “저는 이 생명을 더할 수 없음을 압니다. 주님의 복되신 성령을 보내어 이 일을 해 주십시요”라고 고백하며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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