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새롭게 된 정서(1)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된 우리의 정서가 새롭게 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들이 일시적으로 정서에 끼친 인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변화와 어떻게 다른가? 정서가 새롭게 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서상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인상’은 말씀이나 환난이나 자비를 통한 신적인 경고를 통하여 올 수 있습니다(거듭나든 거듭나지 않든). 그 중에 “양심이 화인(火印)맞은”(딤전4:2) 자들은 더 이상 양심의 감각이 없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모든 경고와 질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합니다(엡4:19).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신령하고 영원한 일에 인상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그 정도로 방탕하거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말씀을 통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정서의 자극에 때때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삶을 바꾸고 죄를 삼가며 거룩한 의무들을 이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의 선함을 ‘아침 구름과 같고, 아침 이슬같이 쉬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들에게 시험이 찾아오면 그 모든 것들은 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정서가 잠시 동안 인상을 받는 것’과 ‘정서의 본질이 영적으로 변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정서가 잠시 받는 인상’은 지속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는 일시적인 인상들을 ‘자주 혹은 때때로’ 받는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설령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인상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경멸하지는 마십시오. 그 인상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물론 그것이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은혜의 방식은 아니지만 이를 위한 예비적인 단계로서 거기에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상이 찾아오는 것을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와 더불어 그러한 인상들이나 의식을 마음이나 양심에 남겨 보전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것이 사라진다면 유익도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정서가 영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정서가 영적인 거룩함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화(聖化)는 인간을 이루는 모든 부분(全人), 즉 영과 혼과 몸(살전5:23)이 모두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모든 부분 중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룩해지는 일이 영혼의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성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죄는 인간이 가지는 분노나 두려움이나 애착 같은 여러 정서 중 어떤 특정한 정서에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행동으로 그것이 분출되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정욕들이나 부패한 욕심들을 제어하는데 있어서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어떤 비정상적인 정서나 부패한 부분에 대하여 아주 약하여 넘어지곤 합니다. 다윗이 그러하였습니다(시18:23). 모든 은혜의 삶 속에서는 아주 모범적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떤 추문에 빠지는 경우를 자주 보지 않습니까? 어떤 특정한 정서가 죄와 사탄을 섬기도록 전적으로 따로 떼어져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탄이 어떤 정서를 이용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죄행을 일으켜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가 되면 그 정서가 은혜의 행동들을 위한 합당한 도구로서의 이점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정서는 죄와 은혜가 싸우는 전장(戰場)입니다. 은혜가 승리하여 그 정서를 장악하고 새로워지면 그 정서는 영적인 용도로 사용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옛 사람’을 이기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 옛 사람이 모든 세력들과 그 모든 기능들을 가지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사라지고 모든 정서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진 정서를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속에 있던 정서는 ‘새 사람’과 어울릴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그 본래의 정서가 완전한 새로움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서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부패한 정서에 특별히 자신이 몰입하여 들어가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정서를 다 드리고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복종시키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되는 일입니다(롬6:17-18).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정서들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가장 꺼려하는 정서가 무엇인지 지켜보십시오. 모든 정서가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위해 쓰려고 할 때, 그 정서가 거룩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십시오. 선한 마음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정서들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정서는 새로워지거나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호10:2).
정서가 영적으로 새로워졌다는 것은 ‘우리의 정서 모두가 거룩하게 변화되어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서의 변화가 부분적이라면 그것은 일시적으로 정서의 인상을 받은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생명 있는 주도적인 은혜의 원리에 속한 것이 영혼에 심기우기 전에는 그 변화가 온 마음의 세력과 정서들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정서의 기능들에 기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변화가 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정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시각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새로워진 정서는 모든 영적인 것들을 애착하며 사모하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와 근거는 물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새로워진 정서는 영적인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떤 것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들은 거부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적인 것들을 가지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에는 여러 가지의 구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같지만 사랑과 존중함의 차원에 있어서 어떤 다른 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인 것들 가운데 우리의 정서로 가장 우선적이고 제일 좋은 자리에 놓아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의 가장 중심적이고 제일 되는 대상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생각하여 마음의 가장 주된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영적인 애착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성품의 영광스러운 탁월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하심을 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근거가 하나님의 성품이 가지신 말로 할 수 없는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바람직함과 영광스러운 속성들 그 자체입니까? 우리의 복됨이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들과 거룩하심을 기억하는 것에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와 근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거룩하신 탁월하심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교통하도록 허락하신 일에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정서가 새롭게 됨으로써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정서의 제일 되는 대상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모른다면, 시험의 날에 크게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워진 정서는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는 간절함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도는 롬11:33-3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지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정서)으로는 감격해 하고 찬탄해 하며 하나님 안에 기뻐하며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달콤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새로워진 정서가 가지는 애착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새로워진 정서는 그 어떤 영적인 것에도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일은 잠시 일어난 정서의 부분적인 변화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음 깊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영적인 것들을 사모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정서는 영적인 모든 일들을 그 본질 자체로 즐거워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84:1).
14장 새롭게 된 정서(2)
새로워진 정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러한 온전한 변화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예배의 의무들을 즐겁게 감당하는 일은 정서가 온전히 새로워지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알려져 신앙을 가지는 것이 공적으로 허락된 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 가지의 의무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한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그러한 의무들을 부지런히 행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새롭게 된 것은 전혀 아니면서도 자기들 나름의 확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이유와 근거들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외적인 부분’이나 예배를 수행하는 외적인 방식에 크게 감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예배의 내면적이고 실질적이고 영적인 핵심을 즐거워하는 것은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에스겔의 웅변과 비유의 우아함 때문에 에스겔의 설교를 기뻐하던 이들이 많았습니다(겔33:31-32). 그래서 그들이 그의 설교를 듣는 일에 열심을 내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죄를 떠나지는 않고 계속 그 가운데서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영적인 은사들을 가진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의 경우에도 여전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설교나 은사들에 사람들이 더 큰 기쁨을 맛보고 더 만족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말씀 전파를 즐거워하는 그들의 마음에 진지함이 있을 수 있음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은사를 통하여 보다는 그런 이들의 은사를 통하여 더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설교자들이 다른 이들의 경우 보다 듣는 자들을 영적으로 세워주는 일에 더 잘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외적인 어떤 환경들에만 국한시켜 생각하려 합니다(딤후3:5).
구약 시대에 백성들이 육체에 관한 규례들이나 세상의 눈에 보이는 성소의 규례들을 지키고 있을 때에 그런 일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 경륜의 때에 백성들이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외적인 엄숙함의 규례들을 크게 기뻐하였고, 그런 규례들을 시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예배를 받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규례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배도(背道, apostasy)할 때에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았습니다. 영적 정서의 외적인 모양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복음적인 예배 속에도 음악과 화려한 의식(儀式)을 곁들여 노래하는 것과 같은 것을 도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나 정서에 와 닿게 하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자기들이 정해놓은 엄숙한 예배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려 합니다. 그런 것들로 예배를 보충하기 때문에, 그들의 예배에는 마음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진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이해하는 말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오직 예배의 질서, 의식, 음악, 육신에 속한 정서를 자극하는 여러 동기들을 부여하는 것들을 통해서 정서에 큰 인상을 남깁니다.
영적으로 새롭게 된 정서를 가진 이들은 그런 것들을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사용하는 자리에 그들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그것들 속에서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하게 마음을 방해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령한 정서에 손해가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의식에 다 같이 즐겁게 참석한 두 사람이 있다고 상정해 봅시다. 한 사람은 예배의 외양을 보고 기뻐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배의 영적 효력을 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서도 두 사람의 기쁨의 종류는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틴(Austin)의 말에 의하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AD296-374. 32세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이 되어 죽기까지 46년간 섬김)는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하였다고 합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놓아두었습니다. 다만 성경 읽다가 중간에 노래하는 것이나, 당시 교회에 막 도입하였던 예배의 어떤 직무들을 수행하다가 노래하는 것은 금하였다는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이러합니다. 목소리를 교묘하게 꾸미거나 음악의 선율이 자칫 거룩한 예배의 의무들을 진행하는 이들에게 긴요한 신령한 정서를 갖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키거나 만족하게 해 주는 무엇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도는 해 놓고 마음과 삶 속에서 그 기도한 대로 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합시다. 그러면 그런 식의 기도는 죄책감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은사들을 활용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이 주는 고통을 무마시키기 위한 묘안을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신의 양심을 쏘는 죄의 독소를 중화시킬 방편들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이 찬물을 들이켜서 열을 내리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잠시 열은 내릴지 모르지만 질병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의무들을 이행하는 일이란 ‘율법 아래서의 속죄제’와도 같습니다. 그것이 잠시간 그들의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의무들 자체가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영적 의무들은 자신을 안심시켜 평안을 주고 마음의 고통을 감소시켜 현재 느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더욱 열심을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즐거움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수록 자신의 마음이 더 큰 평안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얻는 것이 그 의무이행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새로워진 마음의 정서를 가진 이들은 모든 영적 의무들과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야말로 마땅히 존중해야 할 가치와 목적을 가진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방식 속에서 그 의무들을 활용합니다. 이것이 새로워진 마음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영적인 의무를 감당할 때 가지는 필연성과 목적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그 의무들 자체 속에서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시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종결을’ 봅니다. 그 영혼은 ‘그 의무들’ 안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의무들’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을 발견합니다.
정서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지는 않고 표면적으로만 바뀐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의무들을 기뻐하는 제일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의무들을 수행함으로 자기들의 의(義)를 하나님 앞에 보이고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를 받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높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일들을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율법의 여러 의식들과 제사들을 그토록 끈질기게 고집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복음보다 그러한 것들을 더 우위에 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 자신들의 의를 더 내세웠습니다(롬10:3). 그들은 제사의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의의 소망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롬9:31-33).
외양적인 겸손과 경건의 모습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그들이 대표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방식과 자세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것에 관해 선포한 것입니다(사1:11-17, 미6:6-8)
저는 이미 우리의 정서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온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정서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정서가 온전히 새로워진 것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정서상 일부에 변화가 있는 것과 영적으로 온전히 새로워진 것 사이에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마음의 정서가 온전히 새로워짐으로 나오는 경건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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