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로운 윤리’
기도와 윤리는 단순히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둘은 다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 인격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에 관한 교리나 초월적인 것에 관한 교리도 도덕에 관한 견해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것을 재평가할 수 없다. 정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주장은 결국에는 ‘사랑’에 관한 주장-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적인 기반과 의미에 관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자율과 타율을 넘어서는 “신율”을 말한다. 초월적인 것은 외부적인 것이거나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관계들의 궁극적 깊이와 기반과 의미를 가리키는 ‘너’ 안에서 ‘너’와 함께 또 그 ‘너’ 밑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윤리학의 경우 이것은 현실의 구체적 관계의 모든 특수성을 관계의 깊이에서 신성한 것과 거룩한 것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즉 ‘남을 위한 인간’의 무조건적 사랑을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기반으로 인정하며 모든 관계와 모든 결단의 기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처방하지 않는다
조셉 플레처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 윤리’이다.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들어가서 그 구체적인 문제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것과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율법이 아무리 사랑의 요구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기준’보다 더 중요한 이상, 그리스도인에게서 ‘미리 통조림식으로 만들어 놓은’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윤리 기준은 없고 오직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하는 상황윤리만이 옳다는 주장은 율법폐기론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로마서가 가르쳐 주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과 원칙으로서의 윤리 기준은 있어야 한다. 다만 그 기준들이 형식화되고 율법화되어 사람 잡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원래 그것이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을 살리도록 운용하고 사는 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
7. 틀을 개조하는 일
본회퍼는 ‘종교의 패턴’으로서의 ‘그리스도교’와 ‘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둘은 1900년 동안이나 우리 마음속에서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미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기나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만일 내가 말해 온 것과 같은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우리에게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버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내 신념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형태라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세대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것을 불트만은 ‘신화론적인 것’, 틸리히는 ‘초자연주의적인 것’, 본회퍼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각기 자기 관점에 따라 묘사했다-이기 때문이다. ‘비종교적인’ 세상에서 복음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견지하는 것은 복음 자체에 대한 오해임과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망각하는 처사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여기에 요구되는 노력을 귀찮게 여길지라도, 그리스도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하나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틀 또는 변형된 신앙과 생활이다. 이와 같이 새 틀에 맞추어서 새 형태를 만들어내는 공작이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은-우리가 가장 아껴 오던 종교의 범주나 도덕의 절대적인 기준까지도 포함해서-무엇이나 다 일단 용광로에 넣어서 용해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제일 먼저 포기할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신 자신에 관한 이미지인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중대한 궁극적 ‘실재’를 확신하게 하려면 우리는 신에 관한 영상을 모조리-‘저 위에’ 있는 것이든 ‘저 밖에’ 있는 것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떠한 것이든 간에-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확신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모든 피조물 중의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New English Bible).
헉슬리는 계시가 없는 인본주의의 종교를 지향하는 반면, 본회퍼는 종교가 없는 그리스도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테두리’에 반드시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해방시키려고 한 것뿐이다.
성서의 세계관과 다른 내재론적 세계관(범신론)의 본질적 차이점은, 전자는 모든 실재의 기반을 궁극적으로 인격의 자유, 즉 ‘사랑’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신론에서는 실재의 모든 면과, 그 기반과의 관계가 결국에는 결정적인 것이어서 자유나 도덕적 죄악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범신론은 그 표현방식으로 창조라고 하는 인격적 범주가 아니라 유출이나 진화라고 하는 기계적 또는 유기적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우리 존재의 기반과 우리와의 관계의 구조 자체 속에 인격의 자유라고 하는 불멸의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존재의 구조 속에 박혀 있는 이 자유가 우리에게 (의존적 관계 안에서) 자유하게 하며,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거리’를 준다. 그런데 전통적 이신론과 유신론은 바로 이 거리를 ‘객관화’해서 ‘저 밖에’ 있는 신이라는 영상을 그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초월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을 하나의 ‘초개인’으로 이 세계로부터 투영하거나 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하늘을 향한 거리를 반드시 말하거나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모든 경험 안에서 나타난 초월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을 신화의 용어로-‘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라는 말로-객관화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표현 방법을 평가하려면, 그것이 이 투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중요한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해 온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 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와 예배는 점점 더 형식적이 되고 속이 텅 비게 될 것이다.
본회퍼의 말이다.
종교가 없는 세계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무종교적 세속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된 교회이다. 새 출발을 위해서 교회는 그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생활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 즉 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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