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확신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3:14) 니고데모는 주님이 확실히 차지하고 계신 위치로 자신도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이 능한 일이 없으면 인간과 하나님 간의 화목도 없고 인간과 인간 간의 화목도 없다.
이 일의 결과는 죄사함과 용서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생명을 얻는 일에 종교는 아무 가치가 없다. 도덕도 가치가 없다.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하며,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것은 신약성경의 중대한 메시지이다. 우리는 지금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 지금 우리는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과 교통함을 느끼느냐 하는 점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새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자녀로서 인격적으로 그를 알아 간다. 이 교통함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이 시금석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의 영에서 풀려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이렇게 부르짖는다. 그리고 뒤따르는 시금석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이다. 이것이야말로 구원과 거듭남에 대한 확신의 전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위치에 이르러야 한다. 여러분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영생을 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실상 종의 영에 잡혀 있는 것이다. 카톨릭은 확신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구원받은 것을 알고 확신해야 한다.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롬8:15-17)
신약성경은 양자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가르친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심으로 얻는 확신은 우리 스스로 느끼는 확신이나 성경에서 추론해내는 확신과는 다르다. 성령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확신을 주신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
이 일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즉각성과 직접성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우리 영에 어떤 감동을 주신다는 것이며, 우리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이 일을 해주실 수 있다. 여러분이 받을 수 있는 온갖 은사를 훨씬 뛰어넘는 은사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는 이 특권이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져 있다. 이것은 성령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 하시며 ‘너는 나의 자녀다’라고 확인해 주신다. 이것은 최고의 확신이다. 이 확신에 다른 은사가 수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확신은 모호한 행복감이 아닌, 그 행복감을 뛰어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임을 친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경험에 버금가는 경험이다. 언어는 그런 일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저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그 사랑을 내게 주시길 기뻐하셨다고 겸손히 증언할 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인치심”(엡1:13)이라는 말의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단순한 종교인은 결코 이 영역에 이르지 못하며 이 영역을 알지 못한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 이 큰 확신의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로 귀한 시금석을 제공해 준다. 우리 대신 고난 당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가 주신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① 그중 한 가지는 기쁨의 영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이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말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부어진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울은 내내 기쁨을 이야기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신앙이 여러분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든다면, 이런저런 것을 앗아 가기만 한다면, 그래서 항상 크게 희생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이 기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 기쁨은 종교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종교는 항상 과업과 부담이 된다. 하나님을 알수록 두려워진다. 기쁘지 않은 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종교에 불과하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핵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기쁨이 처음 믿었을 때의 기쁨보다 크지 않다면 근본적으로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참 기쁨과 거짓 기쁨을 구분하는 법은 거짓 기쁨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환난과 시련이 닥치면 완전히 낙담해서 기쁨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 참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기쁨으로 환난 중에도, 환난의 심연에서도, 환난의 절정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시금석이 바로 이것이다. 워즈워즈의 시구를 빌리자면 무한한 세계로 끌어올려 주는 기쁨,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기쁨이다.
② 이 기쁨에 즉시 따라오는 것은 감사와 찬양이다. 이 또한 훌륭한 시금석이다. 찬양과 감사는 단순히 좋아하는 찬송을 부르거나 곡조에 매혹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시4:7) 이처럼 추수철은 큰 기쁨의 시기였다. 신약시대 오순절 이후로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가 바로 이 기쁨의 분위기이다. “그 말을 기쁘게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2:41-47)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 감사에 넘쳐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시작했고 이렇게 존속해 왔다. 신약의 서신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높이는 찬양과 감사로 시작된다. 그들은 감사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을 아는 자이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선한 삶을 살거나 종교적 의무를 다했기 때문인가? 그것은 종교이다.
감사하지 않는 믿음은 가치가 없다. 순전히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도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려 드는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 보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바울은 예수를 생각하거나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감사와 찬양과 경배와 흠모의 말을 쏟아낸다.
③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약속과 큰 구원을 믿는다. 이 또한 아주 훌륭한 시금석으로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태도의 또 다른 측면이다. 너무 짓눌려 잠시 기쁨이 무뎌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저 깊은 곳에는 기쁨이 조용히 고여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안다.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만 아는 일이다. 그에게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신뢰가 있다.
사도는 감옥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괜찮다는 것을 알면,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쉴 수 있는 마음,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 쉬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시37:7)라는 구약의 명령을 실생활에서 그대로 따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롬8:28) 사실을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안다. 오 불쌍한 종교인이여! 종교인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죄와 수치와 시련과 환난의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것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의 영광스러운 실제–을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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