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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세속주의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포획했다

강대식 2018. 8. 28. 13:37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부흥과개혁사, 2001

 

마이클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는 호튼의 대표적 저서입니다. 1994년에 출간되어 1995년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가 선정한 기독교와 사회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책의 강조점은 개혁의 일차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교회 개혁 내용의 일차적인 과제는 도덕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혁의 일차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그리고 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행동의 개혁이 아니라 생각의 개혁이다.” 호튼은 21세기 예레미야로서 이 책에서 현재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 주기도문에 담긴 진리로 돌아갈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호튼은 이 책의 1부에서 현재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심각한 질병은 세속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즉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교회가 깊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세상의 정치와 문화와 도덕의 좌·우편에 둘러리를 서려고 서로 싸우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복음은 사라져 간다고 말합니다.

 

세속화란 무엇입니까? 세속화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중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복음주의 교회는 세상 못지 않게 인간중심적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합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세속화 되었을까요? 호튼은 교회 세속화의 근본 원인이 교회가 세속주의의 정확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기독교 국가 건설의 허망에 빠져 있으며, 구원과 창조의 관계 즉 특별 은혜와 일반 은혜의 관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세속화의 포로된 교회, 세상의 문화에 포로된 교회가 어떻게 다시 구출될 수 있을까요? 호튼은 2부에서 세속화된 교회가 다시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의 진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즉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만이 세속주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강조합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만이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호튼은 주기도문이 전반부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후반부에는 인간의 양식, 죄 용서, 영적 전투에 대한 내용을 함께 말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과,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에 대한 균형 있는 강조를 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와 세상은 항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복음화 하려고 하고, 세상은 교회를 세속화 시키려고 합니다.

 

-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의 추천의 글에서

 

     

개인의 필요와 행복과 체험이 진리가 되고 있다

 

과거에 설교들은 죄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제 설교들은 종종 중독, 회복, 느껴지는 필요들 및 여타의 심리학적 범주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일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조지 린드베크(George Lindbeck)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의 시절에는 성경을 우롱하기 위해 자유주의적인 청중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로버트 슐러의 경우가 시사하고 있다시피,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을 말아먹고 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슐러는 죄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인간존재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의 신학은 죄의 핵심이 자긍심의 결여라는 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제는 더 이상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종교의 최대의 이슈는 더 이상 어떻게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내 자신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이다. 슐러에게 있어서 지옥은 "자존심의 상실(the Ioss of pride)"이다. 지옥은 전혀 수직적인(즉 하나님을 향하는) 차원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자존심의 궁극적이며 확실한 원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이루시겠지만 말이다. 제임스 헌터는 복음주의가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수준으로까지자아에 대한 세속적 개념들을 취하고 있으며, “인간 본성의 의미가 이런 식으로 변질되어서, 전통적 개신교의 하부 구조가 침식될 정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신학에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아예 신학 자체에 대해 의심스러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면에서는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들을 팔아먹고 있지만, 보수적 크리스천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비록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만 활발히 유지하고 있다면, 교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아마도 약발이 먹히고혹은 느낌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 진리를 뒷받침해 주는 어떤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변호하려고 할 것이다. 루프(Roof)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크리스천들을 비롯해서, 현대인들은 다른 이유가 아닌 그 체험의 내재성’(inwardness)내부성’(within-ness) 때문에, 직접적인 체험이 언제나 더 신뢰할 만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내재성과 내부성이라는 이 두 가지 속성은 지극히 자기 표현적이며 자기 연민에 빠진 문화에서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간증’ (예수님이 내게 해 준 일)과 개인적인 체험들은 흔히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 가운데서 진리에 대한 가장 권위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다. 만약 무엇인가를 체험했다면, 그것이 진리가 된다. 이것 역시도 세속적 정신에 대한 승복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자리를 자아 가운데 어느 곳엔가 두고 있기 때문이다. (pp 85-87)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 연민과 주관주의의 압력들은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아를 바꾸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재에 대한 해석상의 권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자아와 바꾸어 놓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고유한 신학)과 사람(인간론)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명제적 진술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신학에 대한 거부는 곧 성경에 대한 거부다.

 

성경은 하나님과 자아와 인생 및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물음들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한다. 성경은 궁극적인 문제와 그 해결을 우리가 정의해 나갈 때 우선적인 결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태들을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신학이다. 만약 우리가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계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실재,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융과 매슬로(Maslow)휴머니즘(인본주의)적인 심리학아버지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되려 기독교계의 출판물이나 설교, 방송사업 전체가 마음 안에 있는 신과 인격적이며 주관적이며 내부지향적인 체험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의 객관적인 죄와 죄책을 위해 거의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이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만약 종교라는 것이 어떤 실천적인의미를 가지려고 한다면, 종교는 나 자신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나를 내 속으로 들여보내 주어서, 영적인 체험들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기도와 공동 성경 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너무나도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심과 죽으심에 대해서보다는 목회자와 그의 삶이 성숙되는 것과 영성 캠프에서의 영적 위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있다. 그런 사실은 토크쇼가 독서를 대체해 버리고,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우리 자신의 체험일 뿐인 그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도,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후퇴하고 있는 현대 문화에 타협하고 있는 현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 우리가 알려진것들로부터 신념으로 이동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 감정(느낌)에 도달하기까지 종교적 견해로 저락(低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초대 교회가 그렇게 기록되었다.’ 는 확신을 변호했으며, 중세 교회가 교회가 그렇게 말한다.’는 확신을 변호했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슬로건에 호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요구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적이어야 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며 인생을 좀더 성취하는 삶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 헌터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선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진리의 주관적 적용에 대한 관심으로 강조점이 변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가?” 를 묻지 않고 이 구절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자아는 만물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바로 세속적 휴머니즘의 정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자틀은 다른 것들은 몰아 내고 있으면서도 이 미끼만은 꿀꺽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구속 자체에 대하여 변하고 있는 정의들에 대해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만든다. 죄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라고 재정의되고, 구원이 세속주의의 사상들에 따라, 심리학적인 범주 안에서 재정의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옛날 문제들을 대신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문제들에 맞추어 새로운 해결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는 것이 문제라면, 속죄와 칭의가 그 해결책이다. 그러나 만약 기능 장애와 낮은 자긍심과 채워지지 않은 필요들이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신학적 용어로가 아니라 치유적 용어로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현대의 청중을 위해 기독교 메시지를 상황화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현대의 청중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인 인구의 다섯 명 가운데 네 명 이상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저 밖에 있는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일 뿐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복음주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중생한 크리스천들77%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세속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구원에 이르면, ‘중생한복음주의적 크리스천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이 비기독교도들보다 이런 자수성가 하라.’는 자력 성공 프로그램에 더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구속받는 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선함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 이런 생각의 틀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그저 일종의 도덕적인 안내자로서의 역할 외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이며 세상에 있을 때는 세속주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 조지 바나가 우리 교회들에서는 현재 구원의 본질에 대해 어떤 가르침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까?” 라고 한 질문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pp 87-92)

 

   

간증들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복음주의가 더 대중적이 될수록 복음주의는 점점 현대 세계의 모양을 띄게 되고, 그 자신이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문화의 포로가 되어 간다.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웃들이 거리의 한쪽 구석에 성인용 도색잡지 서점이 하나 열리기를 바랄 경우 세속주의가 침범해 들어왔음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신념들과 전제들과 전략들이 세속적인 태도들과 세속적인 확신들에 휘돌아가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교회는 도전보다는 일반 사회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뒤범벅이며 일반 사회만큼이나 혼란스럽다”(쥬드 다우거티). 복음주의 교회들이 얼마나 크게 시장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간증들은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있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둘 다 실용주의(‘내게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당신도 한번 써 보라’)와 나르시시즘(자기 성취)에 근거해 있다.

 

사도들의 증거는 이것이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된 이시니라”. 그들의 증거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정이나 위기 체험이 아니라 법정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증언이었다. 그 증언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한 사람의 기적들과 교훈들과 죽음과 장사된 일과 부활하고 승천한 일에 대하여 증인된 삶을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증언이었다. 우리의 주관적인 증언이 아니라 바로 이 증인들의 증언이 우리 교회들과 전도에서 최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존 리스의 말이다. “많은 설교들이 도덕적인 권면들이다. 이런 도덕적인 권면들은 로타리 클럽이나 키와니스 클럽에서 훨씬 더 세련되게 전달될 수 있는 권면들이다. 많은 설교들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판단들이다. 그런 판단들은 정치 집회들에서 훨씬 더 큰 지혜와 열정을 가지고서 제시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많은 설교들이 개인적인 치유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잘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정신과 의사들)이 더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설교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유일한 기술은 신학이다. 특별히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와 교회가 세상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기술이다. 다른 곳에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누가 교회에 오겠는가?”

 

우리는 지금 초월성을 가지고서 세속주의와 대결하고 수직적인 차원(하나님)을 가지고서 수평적인 차원(자신과 타인들)과 대결하는 대신에, 오히려 세속과 수평적 차원을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 그다지 영악스럽지도 못하며 잘하지도 못해서 우리가 적절한 연계성을 찾아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연결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는 이 부질없는 세대가 경합하고 있는 목소리들을 뒤쫓아 다니기를 중단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 속보다는 훨씬 더 실재적인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금빛 곡조를 들을 때에만 세상과의 연계성을 찾게 된다. (pp 97-100)

 

 

세속주의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포획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결단코 세상이 아니다. “, , 그것은 그저 신학일 뿐이구요. 나는 그냥 예수님만 사랑하기를 원해요" 라는 말은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서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신조들과 고백들과 일반 교리들을 상당히 비실제적인 범주로 치부해 버리고 포기하면서, 크리스천들은 비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큰 그림을 맞추는 작은 그림 조각들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생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섭리, 기적, 죄와 구속, 역사의 의미, 교회의 맥락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신학적 추구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사물들을 이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은 근대성(모더니티)과 이제는 후기 현대성(포스트모더니티)의 세력들이다. 죄는 기능 장애 혹은 자긍심의 결여로 이해되고 있다.

 

왜냐하면 심리 치료의 혁명이 이제는 그와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명령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 가지 특정한 시장을 타겟(target)으로 삼도록 설계된 사용자 편의를 위주로 하는기업이다. 왜냐하면 경영 혁명이 그와 같은 것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문화 전쟁은 이미 일어나 있었으며 ...... 그리고 승리했다. 세속주의가 세상을 포획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심지어 복음주의자들까지도-포획했다.

 

세속주의는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학을 무장해제시켜 버림으로써 승리했으며, 세대마다 전해 내려왔던 믿음을 개인의 체험으로 바꾸어 버림으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근대에 발명된 어떤 기계와 같은 일종의 도덕 체계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승리했다. 올바른 버튼들을 누르기만 한다면, 심지어 하나님까지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중심적이며 세속화된 인식틀을 채택하지 않고서는 도덕성을 논할 수조차 없다. 교회는 그 자체가 그 중심부에서 세속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도덕적 혼란으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없다. 상대주의와 공리주의적 실용주의를 절대적 도덕들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은 어떤 상대주의자가 절대적인 진술들을 가지고서 상대주의의 참됨을 입증하려고한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자기 모순적인 것이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렴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pp 103-105)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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