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것이 그리스도나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가 거침돌이다/ 마이클 호튼
불신자들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를 쓰고 피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걸림돌”이라 했고(갈5:11), 베드로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 했다. 주님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1) 하셨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거슬리는 것이 십자가나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다. 십자가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복음주의 신앙과 증거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거침돌이다. 우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정치 권력에 대한 추구 때문이다.
갤럽 조사와 바나 연구소의 조사는 복음주의자들과 비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우리는 복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이 모든 것의 모순점은 우리 자신이 걸림돌이 되면서,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거슬림을 제거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죄와 은혜, 율법과 복음,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하심과 같은 개념들은 유행하는 대중적인 심리학의 좀더 ‘적절한’ 주제들로 대체해 버리고서 가장 의심스러운 입장들을 위해서는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서 참여한다 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걸림돌을 제거해 버리면서 온갖 그릇된 이유 때문에 우리 자신이 걸림돌이 되었다. 부도덕힌 생활 스타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복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들의 친구’이셨던 우리 주님이 세워 놓으신 전통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 전쟁을 넘어서서 우리의 원수들에게 심판보다는 복된 소식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24-30).
세상에 대한 심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지금 가라지를 뽑아 내겠다고 설침으로써, 복음을 듣고 믿음과 회개로 응답할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의 임무는 모으고, 추수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해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T.S. 엘리옷은 말했다. “기독교의 진리에서 기독교적 도덕성이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점을 보여 주지 않고 기독교가 일반 문화를 위한 도덕성의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기독교를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치다. 하나의 기독교적 사회를 이교적 사회와 구별시키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바로 도그마(교희)다.” 보수주의적인 교회든지, 자유주의적인 교회든지, 아주 ‘열정적’이며 교리를 그저 일종의 기분 전환이나 우회적인 것으로 여기는 교회는 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세속주의는 그 램프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는 ‘지니’(정령)다.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빠져 나가게 된 결과, 세속주의가 주름을 잡게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교회가 초월적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와 표현과 전달과 복음대로 살아가는 측면에서 약해진 결과다.
애굽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송아지의 형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한 이스라엘이 있었다. 비록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자꾸만 이전에 경험했던 이교적인 속박으로 되돌아갔다. 마틴 루터는 인간의 본성이란 에덴 동산 이래로 언제나 어떤 형태인가의 이교주의에로 되돌아가는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존 칼빈은 인간의 상상력은 “우상을 양산하는 공장”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항상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비판이 열려져 있어야 하며, 성경의 권위적인 판단에 교회가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자주 황폐해지는 것은 교회가 분명한 복음 메시지에서 이탈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흔히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교회사 전체를 통해 이교주의에 연루되어 왔었다. 우리는 중세 세계와 중세 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스의 이원론에 따라 형성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서구 문화는 이교 사상의 여러 요소가 기독교와 결합한 것이었다. 미국 건국이 시조 가운데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무한하시며 인격이신 하나님을 ‘우주적인 통치자이며 인자한 섭리’로 바꿔치기하였다. 그것은 항상 형상 없는 우상이었다. 그들은 이신론자들이었다. 제퍼슨은 자신의 성경을 만들었다. 그는 기적들과 신성과 부활과 구원에 대한 주장들을 다 삭제한 채(‘불경건한 이단설들’이라 불렀다), 예수의 도덕적인 교훈들만을 자신의 성경으로 삼았다.
본질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인 자아관은 계몽주의 이래로, 뉴잉글랜드의 아카데미들이든지, 서부의 개척지에 있는 부흥회 천막들에서든지 미국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세속적인 계몽주의적 생각은 미국 민족주의에 철저하게 스며들어 있으며,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수용해 왔다.
성경은 무오하지만, ‘유대-기독교 전통’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악이 이 이름으로 행해졌다. 이 전통은 이교주의와 계시 종교의 혼합물이다. 이 전통은 호렙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진리를 받고 있는 이야길일 뿐 아니라 저 산 아래서 그 백성이 금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전통은 신앙과 불신앙이 혼합되어 있는 전통이다. 그 전통 자체가 세속화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마치 그 전통이 신적 계시 혹은 성경적 반성의 직접적인 산물인양 ‘유대-기독교 전통’을 혹은 그 문명을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에게는 자명한 진리라는 것이 전혀 없다.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진리’라는 것은 전혀 없다. 비록 그 신이 합리주의적 이신론의 허구적인 신성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건국 조상들을 포함해서 계몽주의자들의 산물에는 의심할 바 없이 어떤 신이라는 것이 있었다. 오늘날 문제는 이신론도 무신론도 아니라 바로 정반대다. 범신론이 문제다. 체스터턴은 우리가 성경 계시를 제거해 버리고 나면, 우리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모든 것을 다 믿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신들이 비처럼 내리는 일“에 대한 니체의 예상이 실현되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점성술을 잘 믿고 본질적으로 미신적인 범신론적 신비적 세계관을 가장 잘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미국에서 교육 받은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진리인 세상이 되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4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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