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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7장 신적 활동으로서 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강대식 2018. 9. 19. 08:35

7장 신적 활동으로서

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지금도 역사 속에서 구속의 역사를 행하시고 계시다고 선포했다. 구약의 약속의 성취가 일어나고 있었다. 메시야의 구원이 행해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찾아오고 계셨다. 죄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의 실체를 제시하셨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먼저 주도적으로 죄인들을 찾으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의 통치의 축복 속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하나님은 바로 찾으시는 하나님이셨다.

 

바리새인들은 의인인 자기 자신들과 죄인들사이에 경직된 장벽을 설치하고서, 죄인들과 접촉하게 되면 자기들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화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그가 이 장벽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스스로 연루됨으로써 그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삼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형식적인 의를 이루는 규례들은 모조리 무시해 버리셨다. 그 규례들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격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외형적인 규례들보다도 죄인에게 더 관심을 가지신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몸소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속으로 이끄심으로써 이러한 죄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서도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을 때에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돌보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대답하셨다(2:15-17). 자기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의원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셔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죄인임을 부인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죄성을 가볍게 해주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필요를 지적하시며,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눅 15장의 세 비유에서 분명히 제시된다. 이 세 비유 모두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이 나타난다. 목자가 양을 찾아다니며, 여인이 동전을 찾기 위해서 집을 쓸며,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이다. 이 비유에서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의 타락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 것이다.

 

초대하시는 하나님

 

찾으시는 하나님은 초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잔치 혹은 연회로 묘사하셨다(22:1,14:16,8:11).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의미했는데, 그 식탁 교제가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15).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바리새인들은 비난했다(11:19). “부른다라는 말은 초대를 의미한다.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대 연회에 초대하는 일이 바로 주님의 사명이었다.”

 

예수께서는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러나 회개에의 부름은 또한 초대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라는 부름이었으며,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초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초대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다가올 심판의 날에 대비하여 죄를 버리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진주와 보화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13:44-46). 지금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천국은 그 가치가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 비유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임재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지금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에 있다. 회개란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다소 합당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다른 변명 거리들을 모두 제쳐두는 것을 의미한다(14:16,22:1).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은 다음 말씀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그런 조건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러면서도 요구의 성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며 동시에 요구인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고 계시며 그의 통치에 굴복하도록 초대하고 계시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아버지 되심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두 개념 사이의 이런 밀접한 관계가 종말론을 말씀하는 문맥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 특별히 주목된다. 종말론적 구원의 때에 의인들이 그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13:43). 복 받을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종말론적 유업을 예비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다(25:34).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온 세상에서 시행될 하나님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새로운 교제를 누리실 것이다(26:29).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가장 큰 기쁨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소유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6:9,10). 왕되심과 아버지되심의 개념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버지되심이라는 선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현재의 선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 나라의 미래의 축복을 얻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의 관계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 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를 아버지로 섬기라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재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그의 나라와 분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최고의 선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인 것이다(6:32,12:30).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하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갖는 완전한 교제가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계를 예수께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의 아버지로서의 보호하심 아래 두시기 위하여 그들을 찾으시며, 그리하여 결국 그들에게 그의 종말론적 다스림의 축복들을 베푸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유대교의 아버지되심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버지되심의 개념이 더욱 풍성해지고 더욱 깊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활동에 기인한다.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목적이 그들을 하나님 자신과 새롭고 더욱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이끄는데 있는 것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는 여전히 그의 은혜로운 제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보응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잃어버린 자를 향하여 관심을 가지셨다고 해서 그의 신적 거룩하심이 온통 자애로운 온유하심으로 바뀌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거룩한 사랑이시기도 하다. 그는 하늘의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의 심판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와 대면할 때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따라서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든지, 심판이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심판은 원칙적으로 예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시는 사역에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선포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반응을 보일 때에, 그들의 종말론적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8:38,10:32-33). 마태와 누가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일에 대한 심판이 종말론적인 마지막 날에는 물론 역사 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높여져서 교만한 자리에 있던 가버나움이 가장 비천한 부끄러움의 자리로 끌어내림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도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종말론적으로는 물론 역사적으로 보신 것이다. 가버나움이 멸망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심판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떤 때에는 임박한 역사적 재난으로 말씀하고, 또 어떤 때에는 묵시론적 초월적 사건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역사적인 것이든 종말론적인 것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데 대하여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다시 한번 활동하셨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그의 백성에게 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의가 거부될 때에는 심판이 이어진다. 곧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심판과 마지막 종말의 때에 있을 심판이 그것이다.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왕적인 다스림의 심판들인 것이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임하시는 것이나 그 임하심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나 모두 이적이다. 곧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요한복음에 보존되어 있는 한 말씀 속에서 잘 정리되어 있다. “내 바실레이아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바실레이아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RSV역은 바실레이아“kingship”(왕권)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 예수님 나라의 근원과 성격은 이 세상보다도 더 높은 질서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오며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다.

 

그것은 사람들과 관련되며 사람들 속에서, 또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이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개인의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람들이 그 나라를 받아들일 때에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 안에서 그 나라가 역사 속으로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셨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메시야의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여전히 하나님의 활동이면서도 인간의 응답을 요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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