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목음 3장 강해`, 22장 그가 전부이신가? (김영희)

강대식 2018. 10. 3. 09:52

22 장   그가 전부이신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 요한의 제자들은 평정심을 잃은 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질투했고, 요한이 분명한 자기주장을 하길 바랐다. 그런 제자들에게 내놓은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 자신이나 육체를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외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자신이 무가 되고, 주님이 전부가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할 때뿐 아니라 이후에도 내내 그러하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우리 삶과 경험의 모든 면에서 흥하시게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그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가 하신 일에 나타난 위대하심을 살펴보자.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약성경의 주요한 주제이다. 사복음서는 주님의 진정한 위대하심과 영광을 밝히고 입증하며 확립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교회는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런데 왜 복음서가 기록되었는가?

첫째로, 기독교가 단순한 철학이 되지 않도록 주님에 대한 사실들을 입증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위격과 존재의 영광 및 그가 하신 일의 영광을 나타내며 이 큰 구원”(2:3)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복음서가 전적으로 주님께 바쳐진 책임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계시록에서도 주님의 영광이 빛나는 본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도 바울이 쓴 대부분의 편지는 마치 무슨 문제와 어려움이 있든 그 해결책은 그를 아는 데 있으며 너희 자신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데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이것이 그가 늘 다루었던 중대한 주제이다.

 

교회의 역사를 읽을 때도 항상 발견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찬송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및 영광을 다루는 찬송과 우리 자신이나 우리 기분, 감정, 상태를 살피는 찬송으로 나눈다. 위대한 찬송은 늘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송이다. 이것이 그를 흥하시게 하는 방법이다. 그를 바라보라.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을 때, 목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도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알면 여러분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 안다고 느끼며 생각하고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3:19)를 헤아려야 한다. 그를 아는 일에는 끝이 없다. 계속 그를 바라보고 상고하고 살펴보면서 그가 커지시고 흥하시게 해야 한다. 그에 대한 무지가 대다수 문제와 실패의 원인이다. 여러분의 모든 시각에서 그가 흥하시길 원한다면 그가 하신 일 또한 바라보라.

 

스스로 겸손히 낮아지신 일을 바라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2:6). 참된 위대하심은 그는 이름을 내려 놓으셨다.(2:7) “자기를 비워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의 신성을 비우실 수 없다. 그는 자기를 비우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와 공유하셨던 영원한 영광의 표시와 휘장과 징표를 내려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성육신의 영광과 경이와 신비는 이처럼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면서도 그 이름을 내려놓으신 데 있다.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면서도 사람들과 같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천하고 가난한 곳, 마구간에 심히 연약하고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다.

성경은 그가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한다.(1:3) 그런 분이 인간의 손에 맡겨진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은 어떤 말이나 상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을 상고할 정신과 지각을 성령께 받아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대한 사실은 그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이이고, 신비이다.

 

사복음서의 목적은 그가 온전한 의미에서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사용하거나 활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절실히 깨우치려는 데 있다. 그는 인간으로 사셨다. 그래서 기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면서 성령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사람의 형체를 가지셨고 인간들과 같이 되시는 데서 더 나아가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주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셨다.

 

주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는가? 예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길 고집하셨는가? 주님은 우리와 동일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셨다. 때가 차매---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율법 아래에!’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장본인이 율법 아래에 나셨다. 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신 것이다. 우리 짐을 자신의 짐으로 삼으신 것이다. 율법 아래에 서신 것이다. 이 세례를 받으신 분이 어떤 분인지 기억하자.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들이 세례를 받으시고 범법자의 자리에 자발적으로 서셨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기 문제는 이제 그만 잊으라. 쇠하게 하라. 이분을 바라보라. 바로 이분과 이분이 하신 일이 곧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가 세례를 받으셨다.

 

이보다 훨씬 더 기이한 일은 그는 시험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않으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는가? 그 해결책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하나님,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를 바라보라. 그는 여러분의 모든 상황을 아신다. 우리를 도우실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어야 하는데, 복되신 주님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4:15)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를 받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돕고 있는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5:6)이신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중대한 담론, 강력한 신학을 쏟아놓는다. 이것이 해결책이다! 너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지 말라. 너희의 문제나 어려움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알라는 것이다. 너희 생각 속에서 그가 흥하시면 다른 문제는 전부 하찮아진다는 것이다. 그를 흥하시게 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이 아버지께 놀랍게 순종하고 복종하신 일을 보라. 성자가 성부께 복종하시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께 복종하시는 것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없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영혼의 고뇌로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슨 값을 치러야 하는지 아셨다. 아버지가 자신을 외면하실 것을 아셨다. 주님은 육신의 죽음을 겁내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무서운 순간이 닥칠 것을 아셨다. 이처럼 주님은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셨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의 모습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조롱과 야유를 받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모습을 보라. 생명을 지으신 분이 죽으셨다. 그 영광 앞에 놀라기는커녕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값싸고 평범한 감상적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생명의 주 생명의 창조자- 를 죽였도다”. 그의 죽음은 말도 안 되는 사건인 동시에, 종이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이렇게 죽기 위해 오셨다. 그의 죽음은 인간이 벌린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목적에 따른 일이었다. 하나님이 친히 그를 어린양으로 보내셨다.

 

지금 여러분의 판단 속에서 그가 점점 더 커지고, 흥하고 계시는가?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주님 혼자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고 말한다.(14:50) 무죄하고 순결하고 무고한 분이 영광을 버리고 와서 인간의 죄를 자기 죄로 삼으시고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다.(63:3) 이 외로움에서 유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부활의 영광도 생각해 보라. 죽음은 그를 잡아둘 수 없었다. 그는 생명을 지으신 분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나오심으로 죽음과 무덤과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것을 이기셨다. 그는 감람산에서 택하신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승천하셨다. 그는 지금 보좌에 앉아 통치하고 계신다. 스스로 낮추심으로 높임을 받으셨다.

 

- 주님을 고찰하는 동안 그가 더 흥하셨는가?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다 잊혔는가? 이것이 시금석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모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안도감과 해방감이 들지 않는 사람, 그와 함께 라면 기꺼이 그 무엇에라도, 지옥에서라도 맞서겠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이제 자기 자신과 자기 문제가 아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라.

 

그와 그의 영광과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위엄을 아는 일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그는 믿는 자의 구주시다.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분이다.(3:1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그가 전부이시다. 이 예수를 바라보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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