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장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삶 전체의 핵심을 보여주는 이 진술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가 이 진술을 살펴보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거쳐야 했던 가장 어려운 일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도, 그 후에도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기독교는 결국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이것이다.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명이요 구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충만함을 거의 모른채 자신으로 꽉 차 있다.
자아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막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 점에서 자아는 첫 번째 원수요 마지막 원수이다.
- 자아를 쇠하게 하기 위한 다른 측면으로 결국 자아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흥하시게 하는 것이다. 자아를 쇠하게 하는 소극적인 조치도 적극적으로 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아를 없애는 최종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가 흥하시면 필연적으로 자아는 쇠하게 되어 있다. 자연에서도 결국 새 잎이 나야 죽은 잎이 떨어진다. 그러나 새 잎이 나기 전부터 죽은 잎이 흔들리는 과정이 진행되다가 새 잎이 나면서 죽은 잎이 떨어지는 것이다. 자아 전체가 흔들리는 소극적인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얼마나 겸손해지고 낮아지는지, 참으로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4-8) 주님은 어떤 꾸지람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일부 나타내시고 살짝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토록 영광스럽고 위대하신 분과 가까이할 수 없는 죄인임을 즉시 느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일이다. 이 점을 모르면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된다. 바울의 열망도 이것이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빌3:12).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 우리를 바르게 붙잡아 주는 것이 바로 이 열망이다. 골로새 교회는 철학과 옛 유대교의 율법 및 이른바 신비 종교의 가르침을 뒤섞었다. 그 가르침의 영향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작아졌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다.(골2:8) 골로새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하여 혼란을 겪었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기록된 히브리서를 보면 그들도 옛 종교를 돌아보며 회기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내내 말하는 바는 “그에 대한 진리만 알면 혼란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뒤를 돌아볼 생각 자체가 들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다른 것들을 흥하게 함으로 그를 쇠하시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든 사람의 문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라. 주님이 주제이다.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바랐다.(엡3:18-19)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주제를 모든 말과 생각의 앞자리에 두고 있는가? 열망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이것이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방법이다.
- “그는 흥하여 하겠고”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① 소극적인 측면)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훼손하기 쉬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주님을 ‘많은 이들 중 하나’로 여기는 것만큼 그의 위대하심과 뛰어나심과 영광을 훼손하는 일은 없다. 그는 단순히 여러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아니며 위대한 스승 중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홀로 유일하신 분으로, 자신의 영광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배타적이 되면 안 되고, 교만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워도 안 되며, 매사에 좋은 점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물이든 그리스도와 나란히 두는 것은 그를 폄하하는 행동이다.
그를 쇠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은 다른 요소를 더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다른 요소를 더하는 큰 죄를 짓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 성모를 추가한다. 마리아를 통해서만 예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제가 꼭 필요하고 교회와 성사가 꼭 필요하다면, 구원에 이런 것들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곧 예수 한 분으로 충분치 않다는 뜻이 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 할례가 꼭 필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예수께 이런 것들을 더하고 추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성인을 자처했지만 그 대단한 지성을 가지고 잘못된 길로 가버린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은 진리를 제시했다. 그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주님을 쇠하시게 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은 주님보다 그가 주시는 선물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모욕하는 것이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회심자를 만들어 내시는 주님보다 회심자 자신의 흥미진진한 간증에 더 관심을 갖는 상태나 상황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의 영광을 훼손한 것이며 그를 쇠하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범하는 또 다른 잘못은 주님 안에 거하는 일보다 주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이다.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이 문제가 나타난다. 그들은 파고들어 연구하며 각 용어와 단어의 의미를 찾아낸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들에게 예수는 엄청난 사상과 개념의 중심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그를 아는 것은 생생하고 실제적인 경험이다. 그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얻는 것이다.
또 다른 잘못은 그의 이름을 내세운 활동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자기 활동에 관심을 쏟았을 뿐이다. 그들도 주님을 몰랐고 주님도 그들을 모르셨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예수와 여러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쇠하시게 하며 여러분을 흥하게 한다.
② 적극적 측면) 소극적 측면 즉, 그를 알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피한 후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히브리서 기자가 채택한 방법보다 나은 방법을 저는 알지 못한다. “너희가 돌아가려 했던 것, 그리스도 옆에 나란히 두려 했던 것들을 다 치워 버려라. 그러면 그것들은 쇠하여지고 그리스도가 흥하실 것이다” 이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는 선지자와 천사, 모세와 아론 및 모든 제사장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했다. 그렇게 대조함으로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이 얼마나 큰지, 그분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준다.
그리스도가 확실히 우리 안에서 흥하시길 원한다면,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길 원한다면, 반드시 이 길을 따라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의 요지는 “그를 직접 보아야 그만 홀로 위대하시며 본질적으로 위대하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작은 아픔과 고통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으며 늘 그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를 아는 일은 그를 바라보는 데서, 그의 본질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그를 얼핏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우리에게 최고로 필요한 일이 이것이다. 그를 아는 것, 이 복되신 분을 아는 것, 그 영광을 얼핏이라도 보는 것이다.
그의 영원하심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는 성부와 동일하신 분,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다. 그의 영원한 거룩하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거룩하신 이!” 이것은 인간에게는 쓸 수 없는 말이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히7:26). 복되신 분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세상 어떤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분의 이야기에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면 토대부터 다시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길 구하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생각하고 묵상하길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와 그의 영광과 그의 위대하심에 대해 들을수록 행복해지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흥하시게 하는 길이다. 그의 본질적인 모습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의 본질적인 위대하심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기 때문에 그가 주시는 이런저런 것들을 얻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위대한 창조 사역도 생각해 보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하나님은 그를 위해 세상을 만드셨다. 만물은 “그를 위하여”(골:16)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 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며 유지되고 있다.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그의 영원한 지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2:3)
- 그가 어떤 분이신지, 그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 때에야 비로소 그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의 시야와 판단과 정서와 존재 전체에서 그가 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보내신 복되신 성령께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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