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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9장 하나님 나라의 비밀

강대식 2018. 10. 17. 15:28

9장   하나님 나라의 비밀

 

하나님 나라에는 두 가지 위대한 순간이 있다. 역사 속에서의 성취역사의 종말에서의 완성이 그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의 정황을 이루는 배경이 된다.

 

비유의 역사적 삶의 정황비밀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11-12).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곧 그 나라가 묵시적으로 실현되기에 앞서서 미리 역사 속으로 임하였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완성에 이르지 않은 성취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들이 가르치는 한 가지 진리인 것이다.

 

바울은 비밀들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감추어졌었으나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날 계시된 비밀들과 하나님의 목적들로 이해했다(16:25-26). 비밀이란 오직 입교한 사람들에게만 선포되는 어떤 은밀한 것이 아니다. 비밀이란 인간의 이성이나 신적인 수준 이하의 모든 이해력으로도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밀한 생각, 계획, 그리고 경륜들을 가리키며, 따라서 이것들은 관련된 자들에게 계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밀은 오로지 믿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촉구하지만, 거기에 응답하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그 비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예견한 대로 장차 묵시론적 권능 가운데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니라가 사실상 감추어진 형태로 미리 세상에 들어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또 그들 안에서 은밀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비밀이며 새로운 계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방식대로 감추어진 은밀한 형태로 임하여 사람들 가운데 조용히 역사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임한다는 사실이 구약의 기대의 진정한 성취가 되는 것이다. 여러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이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이런 비밀을 보기를 바랐으나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다(10:17). 그런데 그들이 보기를 바랐던 그 나라의 강림이 이제 현재의 경험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언하셨다. 사실상 그는 그 나라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임하여 있음을 확증하셨다(12:28). 예수의 말씀과 그의 메시야적 사역 속에 그 나라가 임재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그의 인격 속에 임재하고 있었고, 그 나라는 매시야적 구원으로서 임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구약의 기대의 성취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강림과 임재는 자명한 것이 아니었고, 명백하게 해명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종말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의 권능을 입고서 임하기 전에, 그 종말론적 나라의 권능들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의 역동적 권능이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한 응답을 요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활동이 객관적 사실로 인지되는 반면에, 사람들의 인식에는 개인적 참여가 필요하다.

 

네 가지 밭

 

네 종류의 밭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만이 열매를 맺는다. 만일 밭의 종류가 두 가지 뿐이었다 해도 이 비유의 메시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한 세 가지 밭이 이 비유에 나타난 결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메시지 자체는 전혀 변화가 없다. 그런 세부 사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거부한다는 이 비유의 중심 메시지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둘뿐이며, 이런 성공은 인간이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과거에 해석자들이 생각했듯이 이 비유가 교회 시대에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 비유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이미 임하였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강림이 사람이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그 크신 하나님의 권능이 시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임하였으나 악을 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임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현재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악인을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그 말씀은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얇게 뿌리를 내리다가 곧 죽을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이 시대의 염려로 인하여 말라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히 은밀하게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 그 나라는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자원하여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이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을 받아들이는 곳에는 어디든지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비유 자체에서나 그 해석 부분에서 수확은 강조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유일한 내용은 씨뿌림의 본질이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라지

 

가라지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한층 드러내 보여준다. ,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감추어진 상태로 또한 전혀 기대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에 개신교 학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될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 비유는 교회 안에 선인들과 악인들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 완성의 때가 되기 전에 세상에서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일은 종말론적 완성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정황만이 이 비유의 진짜 요점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재하나 은밀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해석하면 이 비유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임하였으나 사회를 무너뜨리는 그런 방식으로 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고 그 축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시대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하며 사회 속에서 악인들과 뒤섞여 있어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임할 때에 비로소 분리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여기에 과연 새로운 진리의 계시가 있다. , 종말론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 세상에 임해서 그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자손들을 창조할 수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분리의 역사는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 임재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감추어져 있는 그 나라가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혼합된 사회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악인들이 모아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요 의인들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겨자씨

 

겨자씨 비유는 언젠가는 큰 나무가 될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로 세상에 이미 임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교회로 보는 것은 타당성 없는 견해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비유의 강조점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출발과 찬란한 마지막 사이의 대조에서 찾는데, 이 해석의 확실성이 비유의 핵심에서 드러난다. 겨자씨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니지만 작은 것을 상징하는데 비근하게 사용되는 하나의 잠언적인 표현이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당면한 큰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예수의 사역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운동 속에 실제로 임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전반적으로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과 관계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가능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가올 영광스러운 나라가 어떻게 그 보잘 것 없이 초라한 예수의 제자들의 무리와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세리와 죄인들에게나 영접을 받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지고 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망상에 사로잡힌 몽상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처음에는 조그마한 씨요 후에는 큰 나무다. 예수의 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작고 비교적 의미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스러운 임재가 배제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누룩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와 동일한 기본 진리를 가르쳐준다. , 언젠가 이 땅 전체를 다스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거의 인지되지 않는 그런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의 역사적 정황과 적절히 들어맞는 해석은 터무니 없이 적은 누룩과 굉장히 많은 양의 가루와의 사이의 대조에 핵심적인 진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누룩의 양이 적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루 전체가 부풀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비유와 겨자씨 비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겨자씨 비유는 장차 거대한 나무가 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현재로서는 작은 씨앗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누룩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압도하여 그것에 대항하는 세력이 없어질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가루 전체가 다 누룩의 영향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화와 진주

 

이 두 비유에 나타나는 한 가지 사실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어떤 소유물보다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가진 것 전부가 다 소요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에 비하면 아주 적은 값에 불과하다. 이 비유의 요점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예상치 못하던 방식으로, 보통 지나쳐버리고 무시해버리기 쉬운 그런 형태로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 비유들은, 사람들이 얄팍하게 평가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도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그 핵심 요점이 있다. 외형적인 치장이나 눈에 보이는 영광이 없지만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가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모든 소유보다도 값진 보화요, 다른 모든 것보다도 가치있는 진주와도 같은 것이다. 어떤 비용과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소유하기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마지막 비유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낚아올린다는 비유이다. 잡은 고기들을 골라내서 좋은 고기를 보관하고 나쁜 고기들은 내어버린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역사함으로써 창조되는 공동체조차도 종말론적 분리의 역사가 있기 전까지는 순순한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마치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거두어들이는 그물과도 같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 모두를 불러 모으는데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 받아들여진다. 완전하고도 거룩한 공동체는 마지막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이 비유들은 각기 나름대로 예수님의 역사적 사역의 삶의 정황을 가진 한 가지 중심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하였으나 권능보다는 권유하는 형태로 임하였고, 그것이 효과적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마치 땅이 씨를 받아들이듯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나 그것이 지금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종말론적 분리의 역사가 있을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자손들과 악의 자식들이 세상에서 한데 뒤섞여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마치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처럼 그 나라는 그 자체 속에 그 목적을 실현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초인간적인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현재의 모습이 작고 미미하지만(겨자씨처럼) 언젠가는 온 세상을 가득채울 것이며(누룩처럼), 보화와 진주처럼 현재에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찾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 나라가 거룩한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있으며, 거기에 응답하는 자는 누구든지 환영을 받아 그 교제 속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니라가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왔으며, 종말론적 완성의 순간까지 그 나라가 이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역사할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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