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지식 가운데서(in knowledge) 해야 하고,
무지함 가운데(in ignorance) 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퍼킨스
‘기도는 어떤 종류의 행위인가?’.
기도는 ‘입술노동(lip-laboring)’이 아니다. 기도는 특정한 탄원(간청)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즉, 이 행위는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에 관계된 것이다. 롬8:26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한다. 과연 어떻게 간구하시는가? “마음 속의 탄식으로” 하신다. 출14;15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어찌하여 너는 부르짖고만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은 의심할 바 없이 모세의 내적인 울부짖음과 부르짖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받으신 것이다(시28:10,12:5)
‘우리가 기도할 때 따라야 할 형식 또는 규칙은 무엇인가?’
기도의 규칙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낮추면서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나열하는 것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들을 구해야 하고, 그분이 명령하시지 않는 것들을 결코 구해서는 안 된다. 요일5:14은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확신이다. 즉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그의 뜻대로 구하면, 그가 우리를 들으신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KJV는 1611년 완성, 퍼킨스의책은 1595년 출판)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지식 가운데서(in knowledge) 해야 하고, 무지함 가운데(in ignorance)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가련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매우 헌신적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그 후에 그 말씀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노골적인 모욕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이다(시51:17). 왕상21:29은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하게 되었는지 보느냐’”고 말한다.
이 마음의 통회함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우리 자신의 죄와 비참함, 파산된 상태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에게 둘러 싸여있는지, 심지어 사단과 그의 영들에 포위되어 있는지, 안으로는 얼마나 거대한 오물과 반역적인 부패의 바다가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극심하게 불쾌하게 하는지, 그것들이 우리 눈에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아는 것이다. 따라서 사방에 우겨쌈을 당한 채, 우리는 우리의 이 큰 비참함에 대한 감각에 접촉해야만 한다. 따라서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불쌍하고 파산한 거지의 인격과 심정을 입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내재하는 비참한 상태를 분명히 슬퍼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시130:1은 “여호와여,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었나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큰 비참함 가운데 있을 때, 사실상 지옥의 문턱에서 멀지 않을 때,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나이다”는 말이다. 사26;16은 “여호와여, 저희가 고통 중에 주를 떠올리고, 주의 징벌이 저희에게 임할 때에 기도를 쏟아내었나이다”고 했다. 삼상1:15에 “(한나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운 영의 여자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고통 중에 있는 영혼이라는 말이다. 한나는 “나의 영혼을 여호와 앞에 쏟아놓았나이다”고 말했다. 이상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상투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몹시 불쾌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비참함에 대하여 어떤 지각이나 감각도 없이 단지 모양만 내고 있다고 보시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고결함에 대한 허식에 빠져서 그들의 입술로는 굉장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에게서 떠나 방황하고 있다.
둘째, 통회하는 심령에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택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굶주림이다. 사람이 옛 자아를 족쇄로 묶는 것, 그리고 그의 죄와 비참함 아래 엎드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해야만 한다. 반대로 없어서는 안될 은혜들로 부요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는 산혜립을 대항하여 기도했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대하32;20).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간구한 바를 얻기 위해 얼마나 경이로운 소원을 가졌는지 볼 수 있다. 롬8:26 또한 말하기를 “성령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말한다. 시143:6에서 다윗은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되 물이 없어 메마른 땅처럼 갈망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위에 바짝 마른 땅이 자기 몸을 갈라 틈을 만들고 물기를 얻기 위해 구름이라도 먹을 듯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되, 그것을 얻을 때까지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주님 앞에서 물처럼 쏟아내었다”(애2:19).
- 윌리엄 퍼킨스, “주기도 해설”, pp 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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