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그리스도의 부르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1. 부르시는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어떤 분이기에 오늘 당신의 양심을 향하여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는가? 여기서 당신을 부르시는 이는 세상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친구가 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그분은 전능한 분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의 본체로서 만물이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분의 손 안에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배가 있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져 있으며, 그분에게는 모든 충만함이 있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있다. 지금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장차 온 땅의 왕과 재판관이 되실 것이므로 그런 분이 부르신다면 당신은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자기가 약속한 바를 능히 이루신다.(슥13:7, 요1:3, 골2:3, 마28:18,계1:18)
2) 그분은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천국을 떠나 하나님과 누리던 영광을 잠시 버리셨고, 우리를 위해 여자에게서 나시고 이 죄악된 세상에서 33년 동안 사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감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런 분이 하시는 말씀은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분이 주신 약속은 두려움 없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분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철저하게 아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같으시되 죄는 없었던 분이다. 그분은 사람이 겪는 온갖 경험, 즉 가난, 피로함, 굶주림, 목마름, 고통, 유혹 등을 다 겪어보셨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신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아신다.
4) 그분은 약속을 꼭 지키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히6:18) 그분은 자기가 한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신뢰할 것이며, 온전하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정성을 다해 그의 약속에 주목할 것이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거절하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히12:25)
2. 그분은 누구를 부르시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데, 이 표현은 큰 위로와 교훈이 되며,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한 설득력 있고 알기 쉬운 표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모든 계층의 사람이 다 짊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짐을 지게 된 까닭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롬8:22),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82:5) 죄는 모든 사람을 억누르는 고통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대다수의 사람이 모르고, 또 그 마음의 교만한 생각 때문에 나름대로 설명해 보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기울인다.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서도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없애고 싶어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타인이 모르는 큰 불행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혹은 신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부르심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소위 선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이 곧 예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다.
혹은 당신이 아직 회심하지 않아 새로운 마음을 지니지 못했기에 그런 부르심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회심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그분에게로 오라고 하셨을 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인가에 관한 것뿐이다.
당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면 오늘 당신을 향한 이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라. 교만이나 자기를 의롭게 여김 혹은 사람들이 조롱을 두려워 그의 사랑을 거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입니다.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주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3.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인가?
비록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된 것이지만, 이 가운데는 깊은 진리와 요동치 않는 위로가 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한 “내게 빚진 것이나 갚아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는다. 또 “가만히 서서 기다리라”고 말씀 하시지도 않는다. 그 대신 예수께서는 오직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1) 그리스도께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① 교회에 다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②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③ 목회자에게 나아오는 것도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④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도 그에게 나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오직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께 오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죄인됨을 느끼고 세상의 다른 희망은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온 것이다. 그에게 빈 마음으로 나온 사람은 채워질 것이며, 병든 채로 나왔으면 고침을 받을 것이고, 배고픈 채로 나왔으면 배부르게 될 것이고, 가난한 자는 부요하게 되고, 죽어가는 자는 살게 되고, 버림받은 자는 구원을 얻으며, 죄악에 물든 자는 정결해진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부족함을 채워주신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될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기 위해 도피성을 찾아갔고,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구리 뱀을 바라보았듯이 바로 그처럼 절실함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다. 외적인 형식 같은 것은 조금도 의지할 것이 못된다. 어두운 밤에 집을 찾기 위해서 손전등을 켜면 도움을 받지만 그 자체가 집은 아니듯, 은혜받기 위한 외적인 수단이 유익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 전에는 결코 도중에 그만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가치 있고 공로가 있으며, 합당한 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신은 불쌍하고, 죄 많고, 아무 가치 없는 죄인으로서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빈손 들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믿음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2)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참된 신앙인들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도 오해가 없어야 한다.
그들은 천사도 아니고, 결점이 없는 신성한 존재도 아님을 명심하라. 그들은 단지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복스러운 비밀을 알게 된 죄인일 뿐이다. 이사야나 다니엘 같은 선지자들도,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도, 어거스틴이나 루터 같은 신앙인들도, 다 자기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은 죄인이었다. 이 부르심은 거절하는 자에게 결코 핑계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말씀 하신다. “내게로 오라”
4. 부르시는 분이 주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누구나 쉼의 달콤한 맛을 알 것이다. 그리고 쉰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은 “내게로 오라. 부와 쾌락을 주겠다”라고 말하며, 마귀는 “나와 같이 가면,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고, 권력과 지혜를 주겠다”라고 말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안식은 내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양심과 감정과 의지가 총체적으로 누리는 안식이요, 죄 사함 받고 죄책감에서 놓여남으로써 누리는 안식이며, 질병과 죽음이 다가온 뒤에라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안식이며, 인생의 목적이 정해졌으므로 생기는 안식이고,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살 집이 될 것을 믿기에 생기는 안식이다.
1)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나오는 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나타내 보이신다. 온전한 의로움으로 옷 입히시고 그의 보혈로 씻어 주시며 안식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실제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 영혼은 내적인 고요와 평화를 맛보게 된다.
2)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자들에게 천국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신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화목하게 되셨음을(하나님의 진노가 끝쳤음을) 보여 줌으로써 안식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심을 볼 때, 우리 영혼은 내적인 고요와 평화를 누리게 된다.
3)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성령으로 하여금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 즉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알게 하심으로써 안식을 준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되고, 택함 받고 용서받은 자녀들임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 영혼은 고요와 평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4)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자들의 마음속에 왕으로 거하신다. 그들 속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속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해주심으로써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반항심과 혼란이 사라지고 질서가 잡힌 것을 보게 될 때에, 고요와 평화를 우리게 된다. 진정한 왕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에 오르시기 전에는 진실로 내적인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5) 안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특권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자각하는 정도가 달라서 늘 느끼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불신앙 때문에 마음의 잦은 갈등을 겪지 않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개는 두려움 가운데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만약 이 안식을 누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면, 단 하나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이 누리는 안식이 비록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진정으로 유익한 그 무엇을 누리고 있기에 그것을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6) 안식은 누구나 찾아서 얻고자 하면 누릴 수 있다. 누구든지 단지 믿음만 있으면 그리스도의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행복에 이르는 위대한 비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면, 가난도, 무지도, 질병도, 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없다.
7) 안식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게 한다. 살다보면 파산이나, 기근, 질병에 걸릴 수도 있으며, 배우자나 자식이 먼저 죽어 자기만 홀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은 빼앗길 수 없는 그 무엇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 있고, 욥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무엇을 지닌 사람은 진정으로 환경을 초월한 사람이다.
8) 안식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재산이다. 이 안식을 갖게 되면, 임종의 순간에도 평온함을 얻을 수 있으며, 죽어 무덤에 묻힌 뒤에도 영원히 유효하다.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고, 무엇으로도 소용이 없게 될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다. 장차 언젠가는 “부요한”이라는 말과 “가난한”이라는 말의 뜻이 전적으로 달라질 것인데, 안식을 누리는 사람을 가리켜 부요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이와 같은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주시는 안식이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5. 맺는 말
혹 지금껏 말한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지닌 신앙은 무의미하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회교도나 유대교도만 못한 것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충고에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앞서 간 성도가 누리던 평화, 희망, 기쁨, 위로 등을 당신도 맛보기 전에는 결코 스스로에 대해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 당신은 로마 교인과 빌립보 교인들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지도 못하는지 생각해 보라. 물론 종교적인 감정은 종종 거짓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는 신앙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아니다. 우리에게 내적인 위로를 주지 못하는 신앙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영혼의 안식을 갈망하지만, 어디에서 얻을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 영혼의 안식을 얻는 길에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천국에 들어가는 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영적으로 지치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가야 하며, 그 목마름을 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라는 같은 샘에서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얻고자 하나, 두려워서 찾지 못하는 이도 더러 있을 것이다. 비록 당신이 큰 죄인이라고 해도 오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도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함이다. 아직 문은 닫히지 않았고 샘은 마르지 않았다. 지체 말고 그리스도께 오라! 그리스도께 죄인임을 아뢰라. 위대한 의사이신 그에게 치료를 받으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이미 발견하여,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가운 데 그에게 자기 영혼을 온전히 내어맡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는 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를 바라라보며 그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며, 안식과 평화와 자비와 은총을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가련한 죄인이었음과 당신이 가지게 되거나 바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고 있음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조롱하거나 논쟁 가운데서 곤궁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안식과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을 빼앗아가지는 못한다. 당신의 주위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일하면 일할수록 받는 축복도 크다.
확신을 가지고 장차 올 세상에서 누릴 더 나은 안식을 기대하라. 얼마 후면 오실 이가 지체하지 않고 오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좁은 길을 끝까지 오르면 피곤한 여행을 그치고 하나님 나라에 앉아 쉴 수 있다. 그리고 생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고, 인생의 굽고 가파른 길목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게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 영광스런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오르막길 여행의 노고를 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니, 모든 신자들이 온전히 안식하며 감사드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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