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왓슨, 「회 개」, 김동완역, 복있는 사람, 2015
『오늘을 위한 퓨리턴』은 16, 17세기 청교도의 대표작들을 오늘의 언어로 재번역하여 선보이는 시리즈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며, 삶의 전 영역에서 복음을 살아 내려는 청교도의 영적 분투를 담아냈다. 영적 어두움의 시대에 더욱 빛을 밝히는 이 고전들은 독자들에게 참된 신앙의 지표가 될 것이다.
해설의 글 - 아직도 청교도를 읽다니! /박영돈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청교도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주지는 않는다. 청교도 하면 숨 막힐 정도로 삶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엄격한 윤리적인 잣대로 규제하는 도덕적인 결벽주의자,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재미를 말살해 버리는 금욕주의자,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정죄와 비판을 일삼는 바리새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잖다. 이런 부정적인 선입관이 청교도의 진가를 발견하여 음미하는 길을 원칙적으로 봉쇄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도 청교도를 읽어야 할까? 그것은 그들 안에 시대를 초월하는 영성의 보화가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더욱 영롱하게 빛날 보석들이 영적인 방향감각을 상실한 이들의 좌표가 되며 그들의 발걸음을 밝혀 주는 빛이 된다. 청교도 고전은 현재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 우리가 서 있는 영적인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보게 해준다.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의 비극은 우리를 선도해 줄 맨토, 우리에게 본이 될 만한 선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만약 현시대에서 그런 영적 모본과 안내자를 찾을 수 없다면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히 청교도들의 주옥같은 글은 우리를 지나간 시대의 위대한 영혼들과 교통하는 장으로 초대한다.
청교도운동은 16-17세기에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를 카톨릭적 요소와 혼합하여 희석시키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중도주의에 대항하여 영국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고 새롭게 하려던 운동이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히 이론과 교리로만이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직분과 실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 즉 신앙과 삶, 믿음과 행함, 교리와 체험 사이의 심각한 괴리를 극복하고 신앙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들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국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거룩함의 열매가 전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곡해되었다. 그리하여 교인들의 나태와 방종을 조장하여 교회를 타락케 하는 교리로 남용되곤 한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교회가 청교도를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청교도 고전이 현대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여전히 호소력이 있는 것은, 신학적인 깊이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인생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실존적 고뇌와 아픔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이상을 현실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이 땅의 엄연한 현실의 토양에 뿌리내린 영성을 전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편안한 신학의 상아탑에서 안일한 사색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거친 세파에 부대끼며 모진 고난과 핍박과 유배의 상황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청교도들이 자주 다룬 주제, “땅 위의 천국”이 시사하듯, 그들이 메시지는 아골 골짜기 같은 고통스러운 이 땅의 현실 속에 임하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세계를 증거함으로써 고난받는 이들에게 큰 위로를 안겨 준다. 청교도들은 신자의 폐부를 찔러 죄악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외과의인 동시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주님의 온유한 마음으로 상처를 입고 병든 심령과 영혼을 섬세하고 자상하게 위로하고 싸매어 주는 따뜻한 치유자이기도 하다.
“오늘을 위한 퓨리턴” 시리즈는 놀랍고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의식과 이에 수반되는 심오한 죄의식에서 나오는 깊은 회개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동시에 영광스러운 구주의 은혜와 사랑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과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것이다. 더불어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과 추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열정의 불꽃을 우리 심령에 불러일으키는 영적 부흥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
옮긴이 김동완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약1620-1686)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의 설교자이자 신학자, 저술가다. ‘청교도 사역지의 수원지’인 케임브리지 이매뉴얼 칼리지에서 문학사 학위와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646년부터 런던 윌브룩에 소재한 세인트 스티븐 교회에서 10년은 설교자로, 6년은 교구 목사로 섬겼다. 1662년 찰스 2세에 의해 통일령이 통과되었을 때 국교회 예배 방식에 따를 수 없다는 이유로 목사직에서 쫓겨났지만, 끊임없는 투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헛간과 들판, 가정집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1672년에 시행된 신교자유령 선언 이후 크로스비 홀에서 스티븐 차녹과 합류하여 차녹이 죽을 때까지 동역했다. 계속된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했으며, 1686년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교리적인 깊이와 표현의 명확함, 은혜로운 적용이 담긴 설교로 “강단의 대가”라고 불렸던 왓슨은 사역기간 내내 수많은 대중의 마음을 진리로 사로잡았다. 또한 그는 뛰어난 저술가이기도 한데, 제임스 패커는 그의 글을 두고 “그림을 보듯 생동감이 넘치는 서술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탁월하다”고 평했다.
저서로는 『신학의 체계』, 『팔복 해설』, 『십계명 해설』, 『주기도문 해설』, 『토마스 왓슨의 묵상』 등이 있다.
찰스 스펄젼
토마스 왓슨은 청교도 시대를 복음주의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건전한 교리와 가슴을 파고드는 준엄한 체험과 실용적인 지혜의 행복한 결합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
토머스 왓슨의 책들은 지금까지 애독자가 많은데, 이는 다양한 교리를 뚜렷하게 배열해 내고, 대단히 쉬운 문체로 분명하게 제시해서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놀랍도록 실제적인 적용으로 끝내기 때문이다.
저자 서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큰 은혜는 믿음과 회개이다. 이 둘은 성도가 하늘로 비상하는 양 날개이다. 믿음과 회개는 영적인 생명을 보존한다. 내가 논의하려는 은혜는 회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병석에 눕게 되자, 회개의 시편들을 늘 곁에 두고 눈물로써 읽고 또 읽었다. 회개는 결단코 때가 따로 있지 아니하다. 그것은 장인의 연장이나 병사의 무기처럼 늘 곁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 이 시대에는 논쟁이나 이론보다 실제적인 문제들이 한층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회개는 정화이다. 이 정화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라. 크리소스토무스는 네 영혼을 치라고 말했다. 그렇게 침으로써 영혼은 죽음을 벗어날 것이다. 우리가 죄에 더 민감해지고 두 눈이 눈물로 젖는다면 영혼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회개의 강물 위에 임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명백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눈물은 고통스럽지만 순수하다. 글썽이는 눈물이 죄를 씻어 내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 회개는 신심을 키우고 자비를 불러온다. 우리가 회개하는 처음 순간부터 후회와 고통이 클수록 그 뒤로 느끼는 후회와 고통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죄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않는가? 세상의 눈물은 땅에 떨어지지만 거룩한 눈물은 하나님의 병에 담긴다. 죄가 회개의 눈물에 익사하지 않으면 영혼이 불에 타 죽는다. 쉽게 살아 지옥에 가느니 어렵게 살아 천국에 감이 낫다. 우리는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오늘을 회개의 날로 삼자.
우리의 검고 사악한 기운이 하늘로 올라갔으니, 우리에게는 마땅히 이제 곧 천둥이 치리라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하늘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닥치는데 돛대 위에서 자야 하겠는가? 오, 우리의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고 강물처럼 눈물을 쏟아내자! 우리의 개인적인 잘못 외에, 이 나라의 통탄할 만한 형편에도 눈물이 필요하다. 1668년 5월 25일
제 1 장 서론
바울은 더둘로의 거짓 고소로 선동죄의 혐의를 받고서 -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행24:5) - 사도행전 26장에 이르러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다. 바울은 세 가지 문제를 논하는데, 여기서 그의 웅변가적 면모가 드러난다.
첫째, 그는 자신의 회심 이전의 삶을 이야기한다. 개심하기 전의 그는 열정적인 전통주의자였으며, 그 거짓 열정의 불은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만큼 뜨거웠다. “나는---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10)
둘째, 그는 자신의 회심을 이야기 한다.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을 둘러 비추는지라---소리를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3-15)
바울은 이제 자신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가지에 천국의 희망을 접붙였다.
셋째, 그는 회심 이후의 삶을 이야기 한다. 전에는 박해자였던 자가 이제는 전도자가 되었다.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16)
이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구원의 감화를 받게 되자, 이전에 악을 행했던 것만큼이나 열심히 선을 행했다. 성도들을 핍박해 죽이던 자가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살려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들에게까지 가도록 전파의 임무를 넓혀주셨다. 그가 전파한 주제는 이러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20) 중대하고도 뛰어난 주제이다!
믿음과 회개 중 어느 것이 먼저 영혼에 존재하느냐는 문제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분명히 회개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속에서 믿음의 씨앗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불붙인 초를 어두운 방안으로 들여오면 빛이 먼저 보이지만 그 빛에 앞서 초가 있었다.
마음속에 회개보다 먼저 믿음이 씨앗처럼 존재한다. 회개는 은혜이므로 반드시 살아 있는 믿음에 의해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아니면 영혼이 어찌 살겠는가? 회개하는 마음에 먼저 믿음의 씨앗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은 회개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과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분명히 확신하는 바는 회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파산 당했으며, 이제 우리가 붙잡고 천국까지 헤엄쳐 갈 유일한 널조각은 회개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중히 부과된 중대한 의무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라”(행3:19)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행8:22)
회개는 기초적인 은혜이다. 이 기초 위에 세우지 않은 신앙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회개는 복음 아래서 요구되는 은혜이다. 어떤 이들은 이 회개를 율법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초의 설교 첫마디는 “회개하라”였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도 마찬가지였다. 사도들도 한결같이 이 일에만 전념했다.
회개는 오로지 복음의 은혜이다. 행위 언약은 회개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거기 있는 것은 범죄하면 죽으리라는 것뿐이었다. 회개는 복음에서 비롯되었다. 회개하는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피를 주고 사셨다. 율법은 개인적이고 완벽하며 영속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율법은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저주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밝히 드러난 가르침이다
회개의 마음이 생기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어느 정도는 말씀에 의해 -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행2:37)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회개를 이끌어 내시는 동력이다. 말씀은 불과 망치로, 하나는 마음을 달궈 녹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쳐서 부스러뜨린다. 그토록 효능이 뛰어난 말씀이 베풀어지니 얼마나 큰 복인가!
2. 성령에 의해 -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성직자는 피리요 풍금일 뿐이다. 그들을 통해 나오는 말씀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 바람을 불어넣으시기 때문이다. 말씀에 함께하신 성령께서 깨달아 회개하게 하신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마음은 눈물로 녹아내린다.
말씀이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바가 현격히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듣고 마음이 여려서 곧 눈물을 흘린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같은 설교를 듣고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말씀으로 좋아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악화되는 이들도 있다. 같은 땅에 자라도 포도는 단맛을 내고 쑥은 쓴맛을 낸다. 말씀의 영향이 그토록 다르게 미치는 이유는, 성령께서 한 사람의 양심에는 말씀을 전해 주시고 또 한 사람에게는 그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규례(말씀)의 병거라 해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타고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 주지 못할 것이다.
제 2 장 거짓 회개
1. 회개의 첫 번째 속임수는 율법적인 두려움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죄악에 빠져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가 그동안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했는지를 보여주자 번민에 휩싸인다. 잠시 후 양심의 폭풍우가 한 차례 불어 닥친다. 그는 결론을 내려, 죄의 쓴맛을 어느 정도 보았으니 자신은 참된 회개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죄인으로서 두려워한다는 것과 죄인으로서 회개한다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죄책감은 두려움을 낳지만, 은혜가 들어오면 회개를 낳는다.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회개라 할 수 없다.
2. 회개의 두 번째 속임수는 죄에 대한 결심이다.
결심하고 맹세한다 해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제 스스로 엄중히 약속하고도 하나님을 희롱하고 우상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죄에 대한 결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생길 수 있다. 첫째, 현재의 곤경으로 인해 고통스러우므로 결심한다. 둘째, 죽음과 지옥이 두려워서 이다. 자신을 위하는 이 마음에서 맹세가 나오지만, 얼마 안 되어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회개의 결심을 눌러 버릴 것이다. 그러한 불같은 결심은 폭풍우가 닥치면 일었다가 고요해지면 사라진다.
3. 회개의 세 번째 속임수는 죄악된 여러 행실을 떠나는 것이다.
죄는 회개 없이도 버릴 수 있다. 첫째, 어떤 죄는 버리고 어떤 죄는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헤롯은 그릇된 많은 일들을 고쳤지만 근친상간은 버릴 수 없었다.
둘째, 새로운 죄를 맞이하고자 옛 죄를 버릴 수 있다. 이는 죄를 맞바꾸는 것이다. 죄가 교환된다 해도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주인만 바뀌었을 뿐 노예는 여전히 노예이다.
셋째, 은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계산적인 이유로 죄를 버릴 수 있다. 죄가 즐겁지만 죄로 인해 신용이 떨어지고 건강을 해치고 재산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는 계산적인 이유로 죄를 버린다.
빛이 들어옴으로써 대기의 어둠이 사라지듯 은혜의 원리가 들어옴으로써 죄의 행위가 사라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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