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14장 구원하는 믿음

강대식 2019. 7. 9. 21:27

14 장 구원하는 믿음

 

저는 성경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원의 모든 복이 믿음에 의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성화되며, 믿음으로 행한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위대한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에 대한 이 위대한 교리를 재발견하고 재정의한 것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구원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도구 혹은 통로이다. 믿음은 우리를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충만함에 연결시켜 준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이 단어를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단 한 가지 의미에만 국한시킬 것이다.

 

고전 12장의 믿음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특별한 능력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조지 뮐러나 허드슨 테일러가 특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믿음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의 본질

믿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기차에 앉아 부산역까지 가는 것은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수확적 확률법칙에 근거해서 뭔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특정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논증에 의거해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이 묘사하는 믿음은 독특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탄생은 믿음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보여 준다. 믿음은 그가 언제나 갖고 있었던 자연적 능력이 아니다. 그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었다. 그는 수확적 확률 법칙에 의거해서 행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구십구 세였고 사라는 구십 세였다. 인간의 모든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으며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다. 찰스 웨슬리는 주님이 이 믿음을 이루셨으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믿음의 근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씨는 중생 때에 우리 안에 심어지며,

효력있는 부르심에 의해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된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향이라고 불러 왔던 것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성향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우리의 근본적인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3:12).

우리는 믿음을 더 이상 하나님 쪽으로 돌이킬 수 있는 일종의 자연적 능력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성경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난다. 믿음은 진리를 통해 생겨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28:19)모든 민족을 가르쳐라고 해도 상관 없다. 그들에게 정보를 주고,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 앞에 진리를 제시하라.

바울의 그 눈을 뜨게”(26:18)하는 사명은 그들을 가르쳐서 였다. 그들이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것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운명을 보여 줘야 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10:17)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진리에 의해, 복음에 의해, 선포된 메시지에 의해 불러일으켜진다.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성경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믿음은 언제나 말씀에 의해 생겨난다.

 

2. 믿음에 대한 자세한 고찰

 

믿음의 구성 요소

믿음에는 신념이 포함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동의, 우리 앞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확신]”했다. 그들은 이 일들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신념을 의미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인식 혹은 그에 대한 동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믿음에는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신뢰의 요소 역시 포함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동의가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믿음 안에는 불가피하게 신뢰의 요소가 있다. 사람들이 신념의 요소만 인식할 뿐 신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생활에 문제가 일어난다.

 

믿음은 또한 헌신의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믿고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드린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또 로마서 10장의 표현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0:13-14). 신념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게 한다.

 

진리에 대한 동의(역사적 믿음)는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역사적 믿음이란 당신이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언제나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고 어려서는 주일학교나 다른 곳에 나갔기 때문에, 아마도 이 모든 것 때문에 지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을 행하고도 전혀 신뢰하거나 자신을 드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지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한 번도 마음이 끌린 적도, 감동을 받은 적도 없는 성경 전문가들도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5) 사람들이다.

 

믿음이 관여하는 영역

믿음과 관련해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작용하는 것일까요? 씨가 뿌려지고 즉시 싹이 나오지만, 잠시 뒤 말라 버린다.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믿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 뒤 말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히브리서 6장에도 일시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믿음은 전인, 즉 지성과 마음과 의지가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방에 짊어지고 다니는 어떤 지적인 신념이 아니다. 원할 때마다 만지작거리고 꺼냈다 다시 집어 넣었다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여러분 전체를 사로잡는 그 무엇이다.

 

믿음은 지성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6:17) 마음이 우선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리라면, 일차적으로 지성에 말해야 한다. 지성만을 강조한 샌디먼주의가 있다. 그는 믿음은 사람의 지성만을 다룰 뿐 다른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10:9을 잘못 사용하여 , 저는 이것들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샌디먼에 반대하여 믿음은 이성과 지성을 포함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믿음에는 마음 역시 관여해야 한다.

주님에 의해 감동되지 않고는 그분을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이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신을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적인 동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가진 신념에 의해 감동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주의에 대해 비판해야 하지만, 감정을 버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한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여전히 세상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에 대해 저로서는 관심이 없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97:10). 악을 미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사랑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렇다. 악을 떠나 돌아서라. 시편 51편과 139편을 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기 고향을 떠났다. 믿음은 행동한다. 언제나 의지가 관여한다. 믿음이란 단순히 일종의 신앙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주의에서는 마음과 의지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믿음에서는 전인이 관여한다. 그리스도는 전인을 구원해 주시며 어떤 부분도 빼놓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신념과 신뢰와 헌신에 상응하는 것은 지성과 마음과 의지이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은 믿음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추론을 통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인 말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성도 함께 타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믿음에는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이 있다. 파스칼은 이성의 최고의 업적은 이성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단순히 이성이 아니지만, 반면에 이성에 반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비이성적이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초이성이다. 이 말은 이성이 우리가 이성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 지점에서는 계시에 굴복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이 책, 성경에 가두는 것이다. 철학자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특정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거부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마음과 이성으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 위대하고, 너무 신적이고, 너무 영원하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고 질문을 그치라. 사람들 안에 진정 믿음이 생겨났다는 가장 좋은 표지는 그들이 특정한 질문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은 여러분을 성경 안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성경 안에 있으면, 당신은 성경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위대한 복합체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모든 조각이 다 있다. 그 조각들이 마치 완벽한 모자이크처럼 들어맞는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지만, 이성은 절대로 우리를 그 안에 들어가게 만들지 못한다. 성경 안에 있을 때 오직 성경만이 지혜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계시를 받아들인 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과 이성의 관계이다.

 

믿음과 지식의 관계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만 한다. 믿음은 진리가 작용한 결과 생겨나기 때문이다.

믿음의 첫 번째 요소가 신념, 즉 진리에 대한 신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완전히 이해하여 어떤 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지식적 요소는 이해의 요소가 아니라 반드시 깨닫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10:17) 생겨난다. 이와 같이 믿음에는 지식과 이해의 요소가 있다. 여기서 이해는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서신서는 우리에게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호소한다.

그러면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 전반을 다 이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저는 복음의 완전성과 믿음의 존재 자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몇 가지 진리가 있다.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필수적인 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 공의롭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속성들도 믿어야 한다. 우주의 심판자이신 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 계시, 이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악되고 멸망하는 상태를 믿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이것을 믿는 것은 절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신 구속자이심을 알지 못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교리와 우리의 잃어버린 지위와 무력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울도 고전 15장 서두에서 이런 필수적인 사항들을 제시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이 무엇인가?-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3). 우리 주님의 인격과 행하신 일, 즉 제사장적 사역, 중보자적 사역, 속죄가 첫 번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언제나 중심이었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위대한 교리의 몇 가지 측면도 그러하다. 중생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믿음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특정한 복들을 받고자 하는 막연한 욕구가 아니다. 믿음은 이 복음, 이 하나님의 말씀, 이 메시지, 사도들이 전하고 기록한 이 진리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를 감동시켜 무언가를 하도록 만드는 확신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으며, 그분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이자 그야말로 본질적이며 믿음의 완전성에 속한 문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