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라인이 옥스퍼드에 있을 때 친구로 지낸 사무엘 비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의 주님이시여, 저는 지금 당신의 발 앞에 있습니다. 선한 것을 얻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하나님은 물론 제 양심에도 반하는 이 큰 죄악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과 저의 영혼은 물론이요 제가 담당했던 사역과 제가 거하는 집과 아내와 자녀를 비롯한 제가 가진 전부를 주님의 손에 내어 드립니다. 저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의 손에 다시 내어 드립니다. 주님,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가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영원토록 함께하여 주소서!”
교구 목사 에드워드 베리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이렇게 결정합니다. 제 자신이나 저의 가족이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제 양심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일에 대해서 제가 임으로 변경할 수 없는 마땅한 판단이 내려진 것과 같습니다.”
로렌스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가 통일령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열한 가지나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보다 아내와 자녀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는 통일령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열한 가지 이유보다 이 한 가지 이유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솔태시 지방에 사는 존 학스는 가족들을 어떻게 부양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서는, 수많은 병아리들과 함께 있는 어미 닭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설령 저에게 저 닭처럼 많은 자녀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과연 그들 모두를 먹이실 것이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어린 까마귀를 먹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도 먹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했다.
“내가 더 이상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집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합니까? 하지만 그토록 아름답고 인자한 주님의 모습을 한 번 뵈옵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실 때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여 구걸해야 할지라도 나는 만족하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이유로 통일령에 서명하고 동의하기를 거절했다.
청교도들은 무지한 광신자들도 아니고 분별력 없는 고집불통도 아니며 병적으로 소심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영국 국교회가 배출해 낸 가장 탁월한 학자들 가운데 일부였다. 또한 그들은 경건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사람들이었다. 신학박사였던 로버트 핼리 목사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스터의 설교와 오웬의 신학, 하웨의 감화력과 굿윈의 박식함, 차녹의 논리력과 베이츠의 설교, 플로벨의 헌신과 아이삭 암브로우스의 묵상록, 매튜 폴의 주석과 올리버 헤이우드의 수고 그리고 조셉 얼라인의 생애는 얼마나 칭송받을 만한지요! 이전의 영국이 지금처럼 위대하고도 자유로우며 영광스럽고 강력한 뿐만 아니라 신실한 개신교 국가로 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은 결코 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나라와 여러 기관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책들은 매우 깊고 경건하며 실제적이어서 비국교도는 물론 경건한 국교도들도 이것이 성경의 권위보다는 못하더라도 교회의 재산이요 우리 설교자들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로마 가톨릭과 인간 위주의 합리주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어 수단이라 여길 정도입니다.”
청교도들은 위대하고 능력있는 학자요 탁월한 설교자요 인격자였으며, 확신에 찬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명했다. 약 삼 년 후에 런던에서 전염병이 돌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수많은 감독교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피신했지만, 그들은 남아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회중들을 모음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고귀한지를 스스로 증명하였다.
조셉 얼라인의 장인이자 톤턴의 전도자였던 리차드 얼라인의 설교이다.
“저 저물어 가는 태양 빛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단지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아니다. 우리에게까지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사역이 이미 끝나고 있는 거 같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 --- 권세자에게 충성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제 자존심이나 기질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당파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가 통일령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모순되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마음에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는데 주님이 금하신 것들과 관련된 일을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고백한다.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또 전심으로 주님의 지혜를 구한 후에 저는 결론을 내렸다. 목회 사역을 그만두든지 제 양심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저는 거짓으로 사역을 계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과 함께 사역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비록 사람들이 저를 책망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3:20).
저는 제가 섬길 사역지와 제 마음의 평안 가운데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저는 기꺼이 사역지에서 떠나는 고난을 감수한다. 그리고 이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맞이한다. 또한 저를 향해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그 비난을 달게 받아들인다. 궁핍한 삶을 살고 냉소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이 일로 인하여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
이제 저는 양 떼 없는 목자가 되었고, 여러분은 목자 없는 양 떼가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 저에게는 집이 있었지만 이제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13:18).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요. 우리가 지금까지 입으로 설교한 바로 그 거룩한 교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이 현실 속에서도 선포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앞으로 당할 모든 고난을 잘 감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도록’(빌1:20) 기도해 주시요.
성도 여러분, 저는 사도의 말로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13:20,21)”
이 설교는 일반적으로 청교도들이 사랑하는 양 떼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박식하고 경건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교회로부터 아무런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없었다. 또 생활비와 성직자에게 지급되는 십일조를 포기해야 했으며 집도 남겨 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대개 매우 가난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극도로 빈곤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곤경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해를 듣고자 모일 때에 가족을 제외하고 다섯 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비밀집회 금지령’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청교도들이 이전에 사역했던 곳 근처 5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5마일령’도 통과되었다.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법령을 어기고 끊임없이 설교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존 번연도 같은 이유로 베드퍼드에 있는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어야 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토마스 브라우닝은 고난 앞에서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노샘프턴의 감옥에서 자신의 양 떼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온유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려고 손에 손수건을 들고 계신다. -- 복음을 위해 당하는 잔은 다른 어떤 잔보다도 더욱 달콤하다. 그리고 바닥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마음이 더욱 굳세어진다. 제가 말하는 바닥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번연은 베드퍼드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역작인 <천로역정>을 저술했다.
그들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청교도들이 왜 이 모든 고통을 당해야 했던가?
그들이 통일령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할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판결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생명과 영혼과 영성을 어떠한 제도나 조직, 혹은 전통보다 더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넷째, 그들은 평안한 삶을 비롯한 그 어떤 것보다 양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와 개인이 양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자신들이 감당하게 될 그 어떤 고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다섯째,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단지 나그넷길이요 순례의 길일 뿐이라고 여기고 자신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모세처럼 그들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에 고정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이 선택한 이러한 행동으로 어떤 선한 결과를 얻게 되었을까?
첫 번째 선한 결과와 관련하여, 높은 신분에 있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약 모든 목사들이 복종했었다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공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강단에서나 드러나고, 국가가 어떤 국가적인 과제를 성취하도록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선포하는 복음에 배치되는 사항에 복종하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소유를 포기하고 악의 세력에 의해서 자신들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고난 당하는 편을 택했다. 그 결과 이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신앙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는 무신론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당해야 했던 모든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라는 것에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이를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얻게 된 선한 결과이다.
두 번째 선한 결과는, 그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존 오웬, 토마스 굿윈, 존 플라벨과 토마스 브룩스, 그리고 존 하웨를 비롯해서 그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이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남겨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기록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그들의 교활한 대적들이 불리해졌고, 이 쫓겨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후 3세기 동안이나 계속해 설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만약 그들이 축출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상황 속에서도 선한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다. 그분은 다스리시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결국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와 같이 풍성한 유산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고결하고도 영광스러우며 놀라울 정도로 경건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록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 취급 당하고 만물 가운데 찌꺼기와 같이 여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했다.
여러분은 종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날 기독교회의 모든 교파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은 재앙이었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있는가? 아니면 1662년의 그들처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신약성경과 그 속에 등장하는 복음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이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
첫째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그저 출생과 교육과 전통이라는 우연한 사건의 결과라는 관점을 견지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먼저이어야 하겠는가?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신이 우연히 어떤 교단에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겠는가?
둘째로, 우리에게 서명하도록 요구되는 법률 조항이나 신앙고백에 대해서 심중 유보하거나 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도 정직한 것인가? 청교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질문과 대면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거짓 진술을 하거나 심중 유보하지도 않았다.
셋째로, 항상 다수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가? 혹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수의 결정이 매우 잘못되었다면 비록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가 적다 하더라도 남아서 진리를 증거하며 다른 이들을 설득해 진리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가? 청교도들은 10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662년에 이르자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1662년에 그들이 취했던 입장에 설 수 있겠는가? 과연 어느 시점에 가서야 우리 자신이 지금 진리에 대해 타협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는가?
넷째, 우리는 모든 권위주의적인 경향과 교회들이 추진하는 여러 가지 활동, 혹은 여러 교회들로 구성된 연합체나 교회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측면에서 교권주의나 성직계급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들이 로마교회를 닮아 가고 로마교회와 형제처럼 지내려는 경향에 대해서 항상 빈틈없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섯째로, 우리는 오늘날 점점 ‘예전’을 중시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예배와, 설교 대신 ‘예배 의식’을 높이려는 경향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저는 교권주의적인 경향뿐만 아니라 가운이나 예복을 입는 데서 드러나는 의식주의적인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을 높이고 받들어서 지역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대한 지배력을 증가시키려는 관료주의를 더욱 가속화시키려는 경향이 교회 내에서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문제의 핵심이 교리적이 아닌데도 1662년에 축출당한 청교도들은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행동하고, 또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등 엄청난 고난을 감수했다. 이렇게까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와 가장 핵심적인 신앙원리를 부인하는 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1962년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는가? 1662년과 같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그러한 현실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순결함을 고수하느냐 둘 중 하나이다.
워즈워드의 시이다.
“지금 이 나라는 물이 고여 있는 늪과 같습니다. ---
아! 우리를 일으켜 주십시오. 우리에게 예의와 덕과 자유와 힘을 주십시오.
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별과 같이 고고했고,
그대의 목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같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대는 맑은 하늘처럼 순결하고 웅장하며 자유로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했듯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히11:38)
이 능력 있는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찬송시이다.
“저 택함 받은 사도들은 주 성령 받은 후 큰 환난 고통 당할 때 다 참고 이겼네
그 험한 고개 넘어서 저 천성 갔으니 주 예수 믿는 우리도 본받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그렇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따랐기 때문에
무력으로 그들을 정복했던 사람들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실 것입니다.”
-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PP 195-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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