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5부 종교적 정서, 1,2,3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표지들

강대식 2019. 10. 22. 20:50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5부 종교적 정서


에드워즈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부흥신학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쓴 의지의 자유때문에 세상은 철학적 신학자로 취급하지만, 그는 철학이 자신의 신앙을 지도하거나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사변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철학적 흥미가 설교에 영향을 미친 흔적도 전혀 없다. 에드워즈의 진정한 위대성은 성경적 신학자로서 그의 성취에서 발견해야 한다. 에드워즈를 일차적으로 철학적 신학자로 보는 것은 지난 세기가 빚은 거대한 오해다.

에드워즈의 저술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부흥에 대한 것이다. 1735코네티컷골짜기 부흥에 대한 기록인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대각성을 전후해 집필된성령의 역사의 구별되는 표지들, 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 전집7)이다.

 

1 종교적 정서의 배경

 

종교에 있어 이성감정의 기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촌시와 에드워즈를 갈라 놓았다. 촌시는 사탄이 감정을 통해 이성에 역사한다. 성령은 이성을 통해 감정에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에 있어 감정의 표출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종교는 지각 있는 일이므로 감정적 무질서는 절대 피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부흥적 종교를 가짜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인간을 재창조되어야 하는 죄인으로 보았다. 재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의 새 감각을 주실 때였다. 새 감각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는 거룩한 정서로서, 전인을 통해 그 변화의 능력을 발산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부흥은 단지 일회적인 경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타락한 세상이 영광 중에 갱신될 때까지 말세의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찾도록 촉구하는 수단이었다. 부흥이 전파됨에 따라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때에 하나님의 왕국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대각성 기간 중에 복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사이를 양측으로 갈라놓았다.

 

촌시를 비롯한 반부흥주의자들이 합리주의의 성향을 노출하고 있었다면 반대편 극단에는 다소 광신적인 그룹이 있었다. 감정이 지나쳐서 열광적 내지 광신적인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종교적 감정들 중에는 가짜도 많았지만 그들 자신은 단지 자기들이 종교와 관련해서 풍부한 감정을 체험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다. , 거짓된 종교적 감정 상태 속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1742년과 1743년 초에 그 문제에 대한 설교를 이어갔다. 이 설교들이 나중에 1746년 출판된 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의 일부를 이룬다.

 

1차 대각성 기간 중에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봄에 개화한 꽃망울에 비유했다. “나무 위에는 그러한 꽃망울들이 수없이 많이 맺혔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소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다수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회심되었는지 즉 그가 진정한 은혜를 체험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과 냄새가 아니라 그 후에 오는 잘 익은 열매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적 정서에서 진정한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신앙의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에드워즈가 평생 동안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회심의 본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의 고전적 해답이었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종교에 있어 정서의 중요성과 절대필요성에 관한 변증이요, 2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나 종종 참된 표지로 받아들여지는 열두 가지요, 3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두 가지 표지에 대한 해설이다.

 

 

2 장 종교에서 정서의 위치

 

1부에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주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정서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서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보다 왕성하고 감지될 수 있는 활동들로 정의한다. 사람을 중립 상태로부터 혹은 단순한 동의로부터 움직여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경은 동정, 혹은 자비를 자주 참 신앙의 아주 위대하고 본질적인 요소로 언급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참된 신앙을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하나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인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감정들의 으뜸이요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의 원천이다. 하나님에 대한 강렬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인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이 우러나온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정서가 없으면 참 신앙도 없다고 단정한다. 마음에 거룩한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이성의 빛도 선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은혜로운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마음의 습관이나 원리도 선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서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떤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왜 그처럼 많은 꽃송이들이 아무런 영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를 제2부에서 다룬다.

 

 

 

 

 

3 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표지들

 

1 단지 종교적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가 대단히 크고 아주 높이 고양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것이라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는 못 된다.” 참된 종교는 많은 부분이 종교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신앙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감정도 커진다. 사랑은 감정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아주 크고 강한 욕망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기갈을 노래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이다”(42:1). 벧전1:7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높은 정도의 기쁨을 드러내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5:12). “기뻐하고 뛰놀라”(6:2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68: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9:9).

 

한편, 단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반대편 측면을 지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회고한다. 그러나 얼마 후 바울은 그들을 위한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염려를 표한다(4;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 불과 얼마 후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즐거워하지 않았는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이 얼마 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이 고조된 경우라 할지라도 참된 신앙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결론 짓는다.

 

2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반증하는 것도 아니다.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인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집회 중에 육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도 참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지적한다. 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영적 감정들에는 커다란 능력이 있다. 반면, 인간은 연약하다. 혈과 육은 성경에서 아주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위대한 영적, 천상적 작용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고전15:43, 50;26:41). 성경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은 먼지와 재 같은 존재인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인 깨달음이 강하게 주어질 때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육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의 육체가 받은 영향을 언급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3:16). 시편 기자는 강렬한 감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2).

 

3 누가 종교적인 길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많이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서가 참 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특별히 그들의 말이 감동적이고 진지하면 그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력아래 있는 자로 판정해 버린다.

 

입술과 말뿐인 신앙은 성경에서 잎만 무성한 나무로 묘사된다. “잎사귀가 지나치게 많은 나무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는 꼬집는다. 자기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다. “어디에서건, 누구와 함께 하건 자기 체험을 늘어놓는것은 차라리 나쁜 신호라는 것이다. 사람이 종교적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 거룩하지 않은 종교적 정서가 충만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해 많을 말을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종종 대단한 열심과 굉장한 열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되었던가

 

보통 사람들은 흔히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초에는 가짜 부흥사들이 말재주와 언변만 가지고 부흥회를 인도해도 수많은 회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한다고 할 때 그것인 단지 입담과 쇼맨쉽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영성과 경건의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주제에 대해 단지 말을 많이 하고 또 잘하는 것이 참으로 은혜 받은 자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4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정서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정서라는 보장은 없다. 지정된 은혜의 수단을 소홀히 하면서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주제넘음이요 광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보다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서, 인간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고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은혜란 외적 작동자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 그것을 느끼고 분별하며 의식하는 것지각되는 방식으로 구별하는것이 왜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체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도 망상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판단이었다. 한편, 감정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라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억지로 일으킨 감정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다른 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하라!”고 명한다. 에드워즈는 많은 거짓 영들이 아주 다양하게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때로 광명의 천사들로 위장하여 아주 교묘하게, 그리고 아주 큰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다. 또 사탄의 역사도 다양하다. 사탄의 능력은 단지 공포와 무서운 암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거짓 위로와 기쁨으로 나타날 때도 역시 직접적이고 뚜렷하다”.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인상이 자가 발전의 결과도 아니고 악령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나 참된 종교적 정서가 아닌 거짓 것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영향의 결과다.

 

성령의 영향의 결과로 생긴 감정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참된 것으로 받지 않고 구원에 관계된 것과 일반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하는 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적 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하여 그의 영적 분별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역시 악령이나 선한 영과 상관 없이, 약한 신체와 약한 두뇌의 소유자들로서 특별히 예민한 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상이나 생각, 그리고 강한 감정이 자기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5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 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떠오른 성경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떠오른 방식이 놀랍고 희귀한 것이라는 이유로 생겨난 감정은 참된 은혜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참 열매로서,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을 바로 사용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하여 생길 수 있다. 마귀가 성경 본문을 마음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없는 증거가 이디 있는가? 마귀는 예수를 시험할 때도 말씀을 이용했다. 기쁜 감정이 성구와 함께 온 정도가 아니라 성구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구원을 주는 참 신앙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커다란 기쁨을 얻었다. 그것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 종교적 정서 안에 사랑의 외양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가만히 보면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더 많다. 철이나 구리보다 은의 모조품이 더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다이아몬드나 루비도 모조품이 많다. 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저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를 높이는 외침을 외쳤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 혹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7 여러 종류의 종교적 정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 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왕, 아합 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자연인들도 모든 종류의 종교적 정서들을 흉내낼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감정들의 속성을 볼 때 왜 한 감정이 고조되면 다른 감정들도 덩달아 자극을 받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에드워즈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 으뜸이며 그것들의 원천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한 가지 생생한 예를 제시한다. 한동안 지옥에 대한 공포로 인해 크게 질려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하자. 고민과 무시무시한 생각들로 인해 그는 거의 절망할 지경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사탄이 준 어떤 망상에 의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으며, 그를 그 분의 극진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 주셨으며, 그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고 굳게 믿게 됨으로써 갑자기 구조되었다. 이를 테면, 환한 얼굴로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활짝 펴고 피를 흘리는 사람에 대한 어떤 환상, 혹은 강한 상상이 갑자기 그 속에 일어날 때 그는 그 인물을 그리스도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충만하심 및 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길의 탁월성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진 것은 아니면서도, 마치 이런 음성이나 말이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 같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혹은 두려워 말라. 네게 나를 주는 것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니라.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그와 연합된 적이 없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주신 말씀으로 받는다. 이런 경우, 여러 종류의 종교적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 연이어 몰려들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하늘까지 솟아오를 것이며, 그 가상의 하나님과 구속자에 대한 열렬한 감정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라는 생각으로 경탄과 감사로 가득해질 것이며,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아주 겸손해질 것이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참 체험과 거짓 체험 사이에는 그 외양에 있어, 그리고 당사자가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