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지들
에드워즈에게 있어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있다는 말은 곧 그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그가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를 가졌다는 말은 그에게 회심의 은혜가 임한 적이 없다는 말이요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제1.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님.
우리 주위의 신앙고백자들 중 누가 참 신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다는 그는 선을 긋는다. 말하자면, 대략적인 기준은 성경에 있지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양과 염소를 분명히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남겨 두신 특권이다. 그리하여 초두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작업은 단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 데 개략적인 참고가 될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제공하면서 누군가가 이 기준들을 사용하여 주위 교인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려는 시도를 할 위험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전제2. 영적으로 미약한 자들이 확신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됨.
에드워즈는 이 기준들이 불신자는 아니지만 은혜로운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 즉 영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에드워즈는 아주 저조한 은혜의 상태, 혹은 좋지 못한 영적 상태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두 가지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대상에 결함이 있다. “은혜가 너무 적어서 명백하고 확실하게 식별되고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 작은 물체는 우리가 그 형체를 분명히 식별하거나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 없다.
은혜에 관련된 또 하나의 결함은 부패가 그것에 너무 많이 혼합된 것이다. 부패는 은혜를 흐릿하게 만들고 감추어 버림으로써 은혜를 분명히 알아 낼 수 없게 만든다. 참 신자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안 좋은 상태에 있으면 죄책감이 양심에 깔리게 된다. 그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확실한 소망에 의한 평안과 기쁨을 막아 버린다. 즉, 죄책감과 두려움이라는 연기로 인해 내재하는 은혜가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관찰이었다. 미약한 은혜와 지배적인 부패는 대상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또한 그것은 시력을 약화시킨다. 에드워즈는 죄가 눈의 질병과 같아고 생각했다. 부패하고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물들을 식별하고 판단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감각이 무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에드워즈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표지는 아무 것도 제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제 아무리 좋고 틀림없는 표지들을 분명하게 제공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죄를 처리하는 것이다. “부패를 죽이고 은혜 안에서 자람으로써 그것이 활발하게 역사하게 하는 것”외의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에드워즈는 구원의 확신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행동”이다. 그는 사도 바울이 주로 이 방법에 의해 구원의 확신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놓인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던 것이다. 그가 확신을 얻었던 것은 생각보다는 달려감에 의해서였다. 은혜 안에서 자라고 믿음에 덕을 더하는 방법이 우리의 부름과 선택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사도 베드로도 말했다. 이것 없이는 우리의 눈이 흐릴 것이며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와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사죄함 받은 사실이나 미래의 하늘의 기업 어느 것도 밝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전제3. 구제불능의 위선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
에드워즈는 자기가 제시하는 기준들이, 스스로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거짓 체험과 소망을 가진 위선자들에게는 별 격려가 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그런 사람들은 눈이 멀고 자기 의로 인해 마음이 강퍅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자기 의는 큰 겸손의 가면 아래에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 아무리 확실하게 그들의 위선의 증거들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제시하는 표지들이 그러한 위선자들의 출현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 작업에 의미를 부여한다. 또, 그처럼 완악하지는 않은 다른 부류의 위선자들을 깨우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참 성도들이 자기들 속에 혼재하는 거짓된 종교적 정서들을 참 정서들로부터 가려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순수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1 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그 작용
은혜롭고 신령한 감정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진 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작용 즉 성령의 영향이야말로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의 원천이라고 한다.
에드워즈는 “영적”이라는 말을 “덕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사람이 “영적”이 되는 것은 “비범한 은사”가 아니라 덕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갈6:1). 온유라는 덕을 소유했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인정 받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비범한 은사를 자연인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연인이 어떠한 은사를 가졌든 상관없이 그러한 사람을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 “영적인 사람”이라 부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에드워즈가 자연과 은총을 얼마나 날카롭게 구분하는지 드러난다. 그는 자연이 아무리 탁월한 것이어도 결코 은혜를 낳지는 못한다고 본다.
새로운 원리와 감각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신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목적은 그들 속에 새로운 신적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다. 모든 참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그들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면서 그들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새로운 성품의 원리” 즉 “삶과 행위의 신적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성령의 고유한 성품은 거룩함이다. 성도 안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는 성령은 성도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발휘해서 그에게 전달한다. 성도들은 바로 그 거룩한 성품을 전달받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불린다.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저 은혜로운 움직임들과 감정들 속에 “새로운 내적 지각 내지 감각”이 있다. 그것은 그 본질과 종류에 있어 자연인이 느끼는 모든 것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은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 눈에 시력을 주며, 귀에 청력을 주어 귀머거리의 귀를 뚫고 장님의 눈을 열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은 죽은 지각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 새로운 감각이 자연인들에게 있는 모든 원리들을 합한 것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이는 모든 다른 지각과 능력들은 헛되고 무용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에 일으키는 결과들과 열매들이 너무나 복되기 때문에 그것을 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나 “새로운 창조”에 비유된다. 그것은 새로운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해의 능력을 새로이 작동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감각은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을 종교에 대한 이해 내지 인식과 대비시킨다. 사람은 영적 감각이 없이도 교리와 종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있다.
에드워즈는 은혜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꿀을 입으로 맛보는 것과 그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 그것에 대해 얻게 되는 개념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성령은 성도의 마음에 영적 영향을 행사할 때 이 새로운 영적, 신적, 초자연적 원리들을 주입, 혹은 발휘함으로써 역사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신령하고 은혜로운 정서들은 어떤 이해. 개념, 혹은 마음의 감각에서 생긴다. 즉 어떤 신적, 영적인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서 은혜로운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정서는 이해의 결과요 열매다. 역사상, 참된 종교적 정서와 거짓 종교적 정서에 대한 관심을 에드워즈만큼 많이 가지고 그 양자를 그처럼 엄격하게 구별하는 시도를 한 사람은 없다. 모든 종교적 정서가 다 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그는 회심되지 않은 자연인이 느끼는 종교적 감정은 사탄의 역사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상상력과 참된 은혜 체험
에드워즈는 영적인 것과 공상적인 것을 철저히 구분한다. “상상력에 새겨진 인상”이나 “공상적 관념들”은 그것이 “하나님, 그리스도, 혹은 천국, 혹은 종교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은혜나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상상력의 산물은 아무리 그 내용이 종교적이고 은헤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 은혜의 역사는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자연적 차원의 것이지 영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의 체험으로 오인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먼저 어떤 형체에 대한 생생한 관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형체의 얼굴을 보면 그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한다. 또, 위대한 외적 빛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영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피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십자가의 주위에서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바라보았던 그의 원수 유대인들이 가졌던 관념과 그 자체로서 아무 차이가 없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설사 그러한 외적 상념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보편적 사역”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구원에 관련된 성령의 특별한 사역과 자연의 영역에 속한 일반적 사역을 다시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예로 발람의 경우를 인용한다. 발람은 하나님의 의해 야곱으로부터 떠오르는 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하고 뚜렷한 관념이 그 마음에 새겨지는 체험을 했다(민24:16-17).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발견”은 아니었다. “샛별은 결코 그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떠오르는 체험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체험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성경 본문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도 단지 상상력이 자극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어떤 글자들이나 소리들을 마음에 제시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혹은 은혜로운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역사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경험을 자기들 신앙과 소망과 위로의 근거로 삼은 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의 근거가 단지 그러한 성경의 약속들이 자기들 마음에 떠오른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된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단지 어떤 성구가 신기한 방식으로 마음에 떠올랐다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구원에 관한 성구가 갑자기, 그리고 경이롭게 마음에 떠오르는-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본다. 단지 약속의 말씀이 마음에 생각나게 된 그 방법이 신기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믿게 되었다면 에드워즈가 볼 때 그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기억의 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믿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의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은 없다. 특정인이 사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및 자기가 제안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함”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 혹은 미각“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
구원의 확신 문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증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먼저 그는 그것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지적한다. 소위 성령의 증거라는 것은 자주 어떤 이가 회심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직접적 시사” 내지 “인상”으로 오해된다. “너는 나의 자녀야”라고 모종의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으로 하나님이 내면에 말씀하시는 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종종 혼동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가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인”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 성령의 인은 성령의 어떤 “역사” 혹은 “영향”인데 그것은 영혼 위에 “신적 표”로 남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성령의 “증거” 혹은 “인”은, 어떤 이가 구원받았다는 “직접적 시사나 계시”가 아니라, 성령의 “거룩한 도장, 혹은 인상 지위진 이미지로서 양심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성령의 “인”은 “성령의 보증”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성령의 보증 혹은 인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교통과 영향”이다. 그것은 성령이 “양자의 영”으로 혹은 “자녀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에게 하듯 처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고 복음적이며 겸손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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