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 죽는다 해도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를 더욱 급히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보고 기뻐하게 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볼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2:18-30)
-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을 이루라는 하나의 진술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의 본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과 성육신 같은 높은 차원의 교리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16절 중간에서 돌연 개인적인 문제로 화제를 바꾸는 것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지금껏 살펴본 여러 가지 내용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러나 사도는 철저히 교리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앞서 나온 주장의 실증이요 실례이다. 이 본문에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교리가 자기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데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삶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빌립보 교인들의 삶에는 또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주고 있다.
- 교리와 실제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한 시기에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명료한 교리 그 자체를 좋아한다. 교리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자극도 받고 위로도 받는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지치고 피곤할 때, 성경은 –감사하게도 우리를 잘 아는 것 같다- 똑같은 교리를 실제적인 형태로 일깨워 준다. 이를테면 움직이는 교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 없이 그저 보기만 하면 된다. 그 매력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라고 하게 된다. 성경에는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다. 교리든 실제든 선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보여 주는 매력적인 그림들이 나온다. 본문도 그 중 하나로서 교회의 삶을 아주 훌륭하게 그려 주고 있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오늘날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이다.
1. 본문을 요약하면,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이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삶이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19),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4) 그리스도를 떠나서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무슨 결정을 내리든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했다. 디모데를 보낼지 말지 결정하시는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말을 할 때 바울은 로마 감옥 –그 당시 황제는 네로로 추정-에 갇혀 있었다. 바울은 네로 치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네로는 그의 삶을 통치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네로의 죄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라는 것이다. 네로의 군병들에게 묶여 있는 처지지만, 그럼에도 디모데를 보낼지 말지 결정하시며 자신이 직접 빌립보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큰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순복하며 그 뜻에 매여 사는 것, 그 통제 아래 사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통했기 때문에 그의 뜻을 알았고 그의 뜻을 떠나 행동하지 않았다. 바울은 오직 그만 기쁘시게 하기 원했고, 자기가 하는 일이 분명 그의 인도와 지도 아래 있음을 인식했다.
이것은 지금 우리를 향한 부르심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주님과 상관없이 혼자서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을 단순히 상식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쉽다. 물론 상식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상식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 아래 있어야 한다. 매사에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그의 실제적인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하늘에 잇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도는 그 이야기를 지금 실제적인 차원에서 하고 있다.
“가이사 권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결정이 네로의 결정을 좌우한다 그리스도의 뜻이 만물을 다스린다”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라. 주의 말씀이 어떻게 왕과 군주들에게 임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셨는지 보라. 모든 것이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아래 있음을 지금 바로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하실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뜻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높고 고상하면서도 자연적이고 인간적이다. 본문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감정이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것’의 반대를 ‘부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바로 잡아주고 ‘자연적인 것’의 반대는 ‘영적인 것’이며 영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자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님을 깨우쳐 준다.
사도가 하는 말들에 주목하기 바란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19)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을 염려했다. 사도는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디모데를 보내 직접 소식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인가!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26)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에바브로디도는 향수병에 걸려 친구와 친지들이 기다리는 빌립보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애석하게도 자연스러운 감정을 다 잃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여기는 듯한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대단한 하나님의 종도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친구들을 한 번 더 만나기를 고대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7)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가 병들자 사도는 마음이 무겁고 아팠을 것이고, 잠시나마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자연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이런 감정들을 다 죽여 없애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왜곡하는 게 죄이지, 고귀하고 참된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며 내 근심을 덜려 함이니라”(28) 이 말에도 인간적인 면모가 나타나 있지 않는가!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는 것이 너희가 얼마나 기뻐할지 알기 때문이다. 에바브로디도의 얼굴을 보고 기뻐할 너희를 생각하면 모든 시름을 잊고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놀라운 삶, 하늘의 영역에 거하는 삶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점을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특징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솟구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두 발은 항상 땅에 딛고 있었다. 그에게는 ‘육신을 못 박은 것은 곧 감정과 은사를 못 박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사람의 모습이나 잘못된 금욕주의자의 모습이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하늘과 땅의 특징”이 공히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자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또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토록 굉장한 기적들을 행했지만 정작 에바브로디도의 병은 고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병이든 믿기만 하면 고침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도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필요를 느낄 때마다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치유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린 일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오직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심으로 나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모순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칙은 한 가지이다. 즉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성령의 통치권과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기적적으로 고치고 누구를 고치지 않을지 결정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어떤 사람이 기적적인 치유를 받지 못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해서 그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모든 일은 그의 결정에 달려 있다.
2. 본문에 나오는 놀라운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5) 일차적으로는 에바브로디도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히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1) “나의 형제요” 우리는 형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형제가 되었다. 단순히 서로 “형제”라고 부른다고 해서 우리가 한 그리스도임을 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짜 형제의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가족관계와 형제관계는 호칭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에서 서로 얼마나 염려해 주는지 보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 감옥에 있는 동안 시중을 들게 했다. 이렇게 형제애를 나타냈다. 바울은 디모데 또한 아들처럼 자신을 섬겼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서 아주 요긴하고 도움이 되었음에도 돌려보냈다.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시한 것이다. 형제간이란 이런 것이다. 혈연의식과 서로를 향한 지대한 관심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 “함께 수고한 자” 이 말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병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반면, 어떤 이들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했다고 말한다.(21) 우리는 함께 수고하는 자이다.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주인을 위해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이며, 사람들에게 현재의 위험한 처지를 알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는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절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주위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너희에게 보낼 만한 사람은 디모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디모데 외에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일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더 염려한다”라고 말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그런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를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와 자기 안위와 자기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2:3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했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자신의 염려를 제쳐 놓고 그를 위해 일해야 한다.
바울은 16-17에서 이 일의 특징을 기술한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것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다니, 정말 굉장하지 않는가!
3) “함께 군사 된 자”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및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울 특권을 받은 군사이다. 또한 잘못된 교리와 교회 안팎의 오류와도 맞서 싸우는 군사이다. 바울은 1장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싸우라고! 말한다. 교리를 순전히 지키기 위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와 에브로디도의 영광스러운 정신을 공유함으로 함께 군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디모데도 자기를 돌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거의 죽기에 이르렀으면서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다. 이 세대의 비극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기꺼이 찬양하면서도, 정작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나라와 관련해서는 이런 정신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군인은 전시에 왕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독려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비웃음을 사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미미한 수준의 핍박조차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자. 전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모두 함께 군사 된 자로서 대오에서 이탈하지 않겠다고, 비틀거리거나 낙오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어떤 요구,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설렁 죽는다 해도 개의치 않고 우리 영광의 왕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일어나 싸우겠다고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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