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2부 2장 참된 예배 (김영희)

강대식 2020. 1. 7. 20:22

2 장 참된 예배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3:3)

 

-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들 중 하나이다. 편지를 받아보는 이들은 이미 회심하여 교인이 된 자들이었지만, 복음의 가르침과 교리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단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생겨났으며, 사도는 평생 그들과 큰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이처럼 거듭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내려주는 것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공격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빌립보 교회의 기쁨을 쉽게 방해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문제를 언급한다.

 

유대교인들에게서 비롯된 파괴적인 거짓 가르침과 오류가 문제였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사도가 참된 기독교 전체를 뿌리부터 완전히 뒤엎는다고 지적해 마지않던 가르침과 교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했다. 바울이 여기에서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교리를 받아들일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의 신분 자체가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1. 이 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식

1)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그는 이미 말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겠다고 한다. 바울은 반복을 좋아한다. 이 또한 바울이 얼마나 깊이 있고 지혜로운 선생인지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믿음의 기초가 확실하고 흠 없이 온전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교활한 시험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정한 삶의 수준에 도달했으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첫째가는 원리를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 반복은 필수이다. 기초가 잘못되었는데도 올바르다고 착각할 위험은 늘 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세 번 거듭해서 삼가라는 말로 위험성을 각인 시킨다.

 

3)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일 -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격한 표현을 쓴 것이다. 바울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며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처럼 개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개처럼 물어뜯으며 파괴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뒤엎고 분열과 당파를 조장하는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들이 전한 교리에 대한 바울의 평가이다.

그리고 그들은 몸을 상해하는 일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전하는 것은 할례지만, 실제 의도는 신체를 훼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할례파는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4) 그리스도인의 요건을 적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약하면) 우리의 현재 신분과 영원한 신분은 그리스도인의 요건(기본 요소)을 분명히 아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항상 우리를 오도하려 드는 거짓 가르침을 피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사느냐 못 사느냐는 교리를 정확히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 본인은 정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가르침을 믿는 탓에 바울이 말하는 주 안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것을 거의 죄악시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 바라볼 뿐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리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일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심각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 의지했던 것들을 다 빼앗기는 막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중요하게 부각될 한 가지 문제는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그에게 기도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신분부터 확인해야 한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기도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고 기초적인 사실들조차 의심된다면 어떻게 그 토대 위에 기도의 집을 세우겠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곧장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지금 너희가 서 있는 자리부터 확인해 보아라

하나님을 아는 일 외에 그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시기가 오리라는 징조가 무수히 눈에 띄지 않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안전한 일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에 대한 바울의 삼중적인 정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하며 제사도 드려야 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삼중의 정의로 반박한다. 우리가 그때와 똑같은 거짓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변에 깔린 원리는 같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상황은 빌립보 교인들의 상황처럼 위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바울의 삼중적인 정의를 참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봉사(예배)”- 참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아보려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예배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1)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유대교인들이 말하는 다른 방편들이 필요치 않음을 아는 자들이다. 옛 방법은 폐기되었다. 옛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짓이다. 이것이 바울의 메시지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화려한 건물을 높이 세우고, 기계적인 형식의 예배와 삶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큰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사람들이 단지 특정 형태의 건물에 감명 받는 게 아닌가 싶어 늘 딱한 생각이 든다. 이교도도 자기들의 신전에서 경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외양과 실제를 착각하고 있으며, 참된 경건이 아니라 경건의 모양만 갖추려 하고 있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경건하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영을 다해 예배하는 사람이다.

 

2)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것,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여러분은 의무감으로 예배하는가, 예배하고 싶은 열망으로 예배하는가? 정말 속에서 우러나와서 예배하는가?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역사로 예배하는 자들, 예배가 의무가 아니라 열망인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억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고 이끌려서 예배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억지로 예배하는 것과 마음이 움직이고 이끌려서 무언가 속에서 나를 재촉하며 끌고 가서 예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기계적으로 침대 곁에 무릎을 꿇는 것과, 성경을 읽거나 길을 걷거나 묵상하다가 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무언가가 내 마음을 움직이고 흔든다. 성령의 인도가 느껴진다. 이렇게 내면이 움직이고 사로잡히며 이끌리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의 특징이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냉냉하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늘 뜨겁고 사랑이 넘치며 자유롭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딴 생각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예배와 찬양에 빠져든다. 차가운 형식에 갇히지 않는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예배할수록 이런 방편(건물, 예식, 사람 등)에 덜 의지하게 된다.

 

3)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면,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탬버린을 치는 예배가 자유로운 예배이며 진짜 예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4:24)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사람은 그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쉽게 굴거나 육신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참된 예배에는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12:28) 그러면서도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8:15) 하나님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머리카락까지 다 세실 정도로 나를 생각하고 계신다. 나에게 생기는 일 중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가? 우리야말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할례파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예배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관점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