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겸손
여기서 비로소 거룩한 정서의 표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시작된다. 앞의 다섯 가지는 표지라기보다는 그것의 원천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이 겸손이라는 주제 하나에 대해 무려 30페이지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사랑, 온유, 조용함, 용서 및 자비를 다 합해서 불과 13페이지를 할애한다.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복음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게 된다. 전자 아래서는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 후자 아래에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복음적 겸손이 없는 자는 참 신앙이 없는 자다. 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의지가 변화된다. 즉, 성품 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 기독교적 자기 부인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세상적 성향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명예, 권력, 부, 쾌락, 정욕 등 세상적 목표들에 대한 욕심 내지 끌림을 버리는 것이다. 은자들이나 은둔자들이 버린 것이 바로 이 동물적, 마귀적 정욕이었다. 다른 하나는 타고난 자고함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가장 위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인들은 사막이나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고대의 은자들의 경건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들의 겸손이 거짓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은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의를 전혀 버리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한 정욕을 버리고 다른 정욕을 산 것뿐이었다. “짐승 같은 정욕을 팔고 마귀 같은 정욕을 만족시킨” 것이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에드워즈는 보았다.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 율법적 영이란 무엇이든 자만하는 영이었다. 자기의 의로움, 도덕성, 거룩성, 감정, 체험, 신앙, 겸손 등 어떤 좋은 것이든 그것에 대해 자부하는 영적 교만이야말로 율법적 영이었다.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 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데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고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는 데서 사탄의 교묘함은 그 절정에 달한다고 한다.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영적 교만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긴다.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그들은 권위를 지닌 총감독이나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벧전5:5 참조).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의무의 규칙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 속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에드워즈의 죄론이 등장한다.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는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관련된 주제이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아마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 교회사에서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모든 죄는 그 안에 “무한한 결함과 가증스러움”을 안고 있다. 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공경할 우리의 의무는 그의 사랑스러움이나 명예로움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 하나님은 무한 사랑스러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할 우리의 의무도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반하는 어떤 것도 무한한 불의, 결함 및 무가치함을 지닌다.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여 가증스럽다. 대상의 위대함과 주체의 비천함 및 열등함은 그것을 악화시킨다. 대상의 우월성이 크면 클수록 열등한 자가 그 우월한 자를 공경할 의무는 그만큼 더 커지는 반면,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더 가증스러워진다.
에드워즈는 무한의 개념을 즐겨 활용하고 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참된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선함과 거룩함이 그만큼 더 작아 보인다. “인간의 오염과 일탈을 감추어 주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마음에 흘러 들어온 빛은 그것을 드러내고 가장 은밀한 구석에서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선명히 나타나게 한다. 특별히 만물을 꿰뚫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은 그러하다.”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겸손, 더 많은 감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가증한 교만과 배은망덕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지각하게 한다.
영적 교만의 틀림없는 표지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위조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위조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 반면,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실제로 소유한 존귀함의 정도와 자기를 낮추는 정도로 겸손을 평가할 수 있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 아주 낮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모든 행위들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처럼 비열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겸손이나 자기비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존경하는 신학자 매스트리히트의 표현을 빌어서, 겸손을 한마디로 일종의 “거룩한 소심함(holy pusillanimity)”이라고 정의한다. 거지와 같은 가난한 심령을 은혜로운 겸손이라 본다. 은혜로운 정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계속적으로 하나님 집의 문간에 있는 거지로 자처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적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선언한다. “모든 참된 신령한 지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뭇사람을 공경하며”(벧전2:17)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거짓 형제들과 박해자들까지 공경한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정서들을 마리아의 향유에 비유한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로운 정서들도 상한(깨어진)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한” 상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이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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