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9 주일설교
본문: 마 16:15-18
제목: 주는 그리스도시요
1.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그 이전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율법과 선지서를 배운 유대인이니까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긴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그분이 오셨는데 알아 보지 못했고 믿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으로 오셨다.(요1:9-11)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그분은 창조주시다,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땅 유대 땅에 오셨는데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24:44)이라 하셨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읽고도 유대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원하는 것만 보았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기”(눅24:45)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모르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애국가를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딤후6:15,계17:14)
하나님이 아니면 그런 지위와 특권을 가질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이실 수가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 그것을 믿으라.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을 귀하고 높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간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확실한 표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확실히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짜이다.
오늘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3년 동안 예수님 아래서 제자 훈련을 받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고백, 성경 구절을 따라 외우는 고백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예수로 오신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실히 믿고,
그분이 성경이 줄곧 예언한 그리스도, 곧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아니라면 그 고백은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분이시다.
그분이 현재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성자 하나님이시고,
왕중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
현재 세계를 참으로 통치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다.
지금 나의 인생 전체, 나의 운명, 나의 가정, 나의 사업을 통치하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거룩함으로, 공의와 정의로, 진리와 법도로 다스리고 계신다.
세상 통치자들의 잘못된 통치들은 바로 잡힐 날이 오게 돼 있다. 사필귀정이다.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그분이 섭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일들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신앙 고백은
바로 그 통치를 믿는다는 고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입술로는 그렇게 고백을 하고서는, 실제 삶에서는, 내 생각과 의를 믿고,
돈과 권력과 권력자들을 믿고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믿고 두려워하는 것은
입술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다.
오늘 내 환경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도,
다 그분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자 하나님으로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로서,
믿는 우리에게 아무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니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떡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땅에다가 보물을 쌓지 말고 영원히 살게될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니까,
염려와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채우고, 하루 하루를 채우고, 허덕이는 것이다.
그분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면,
오직 그분만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분이 통치하고 계시니까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며 평안을 누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성화 성숙을 이루면 그분은 우리를 높이시고 크게 쓰실 것이다.
요셉이 대애굽제국의 총리가 될 야망을 품고 달려갔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다윗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될 꿈을 안고 달려갔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모세가 능력의 해방자가 될 꿈을 꾸고 달려갔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13년간의 노예생활, 억울한 감옥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기에,
10여년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며 말씀의 사람으로 그릇이 되었기에,
40년간의 가시떨기 같은 광야생활을 통과하며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셔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는 과정, 사람을 쓰시는 과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
왜냐? 우리도 지금 그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복주머니나 문제 해결사나 해방자나 병고치는 자로 여기는 것은
미신을 믿거나 자기 철학을 믿는 것일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운명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사업 나의 나라를, 섭리 가운데
통치하고 계심을 믿지 못한다면 주께 대한 신앙고백은 허탄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의 신앙 고백이 될 때, 확신이 될 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그 아무것도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38-39)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 안에서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요,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외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좌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우리의 운명을 만들고 좌우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주님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2.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바요나 시몬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아들 시몬에게 복이 있도다 하신다.
이 신앙고백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고 영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현재 작은 일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기업으로 받는 사람이다.
주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혈육, 곧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서는 알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다.
세상의 영을 받아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사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아버지만이 이를 알게 해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다. 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어떻게 알게 해주시는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2-13)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야 거듭날 수 있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 가르치신 지혜로만 영적인 것은 분별할 수 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없고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는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은혜로 주신 것들은 영적인 것들이요, 그 으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성경이고 교회이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로 제도권 종교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문제이다.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왜곡하고 인간화한다.
성경도 사람의 지혜와 학문으로 해석하고 또 적용한다.
목사를 세우는 신학교도 처음에는 성령의 사람들이 세워놓지만,
그 다음에는 어느새 사람의 지혜로 무장한 사람들이 학위를 가지고 세상 학교로 만들고 만다.
청교도들이 세운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이 그러했고, 우리 나라 연세대 등이 그러하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변질되자 메이첸과 세 교수가 나와 페이스를 세웠지만 또 변질되고 말았다.
세상 유명 대학의 학위는 사람의 지혜이지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을 깊이 연구 공부해야 한다.
성령의 사람들이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한 책들을 공부함으로 영적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지혜, 초등학문, 자기의 옳은 소견에 사로잡혀서 멸망 길로 가고만다.
3. 그리스도는 이 반석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주님이 세우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와 초등학문으로 자기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과 다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신앙고백을 입술로는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유익과 목적을 따라 세운 교회는
주님이 이 반석 위에 세운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다 교회가 아니다.
넓은 문, 큰 길로 해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목사와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 교회처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들인 현대 교회들이 많이 있다.
주님이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의 영이 있고, 미혹의 영이 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미혹의 영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1,5-6)
‘우리의 말’은 사도의 말이요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말이다.
이 성령의 가르침은 4세기에 어거스틴이 집대성하였고, 14-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되살렸고,
17세기의 청교도들이 그 전통을 이어받아 완성하였으며, 18세기의 대표는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의 대표는 존 라일과 스펄전, 20세기의 대표는 로이드 존스이다.
우리 ‘청교도 아카데미’는 이들의 책들을 요약해서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는 작업을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곧 2020-1학기가 시작된다.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
사람의 지헤로 가르친 것과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떡을 위해 바치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 내어, 말씀 공부하여, 복 있는 사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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