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2 주일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롬 5:1-4

강대식 2020. 2. 2. 15:18

2020-02-02 주일설교

본문: 5:1-4

제목: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죄인이 죄를 지닌 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하여 죄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행하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

율법의 하나라도 범하면 그는 의로워질 수가 없다.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그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물려받은 죄성이 이를 지킬 수 없게 하고,

영적으로는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지킬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조문화하여 지킬려고 하였으나 겉만 지키고 속은 버렸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3-26)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고, 그 초등교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3:23-25)

 

이스라엘은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임을 알지 못하였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려고 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 겉으로만 지키고 속은 온갖 죄악으로 여전히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의롭다 함을 받아야 의로운 율법도 지킬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죄는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을 받을 수가 없다.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죄를 사함 받게 하였지만 사람이 의로워질 수는 없었다.

 

사람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흘리는 피가 필요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기에 그 죄의 형벌을 받아 죽는 피였다.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루터의 고행도 이신칭의를 깨닫는 순간 죄에서 해방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되었다.)

 

그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지혜이고 능력이다.

인류의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면서 십자가에서 흘린 죽음의 피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생명의 피가 되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사랑의 구원이 실현된 곳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1-26)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하였지만,

이스라엘은 맹인들이 되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였다.

 

지금도 교회 안에 맹인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

성령이 그 마음에 오셔서 그 눈을 뜨게 하고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셔야만 한다.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 그 마음에 비춰져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보고

그 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

 

여전히 죄가 있고 죄를 짓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의로운 율법도 계명도 지킬 수 있게 된다.

 

이 믿음과 역사는 오직 성령만이 주실 수 있고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와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어떻게 인간의 지헤로 믿을 수 있겠어요?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직분이 높다고 해서, 세례 받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며 주여 주여 했어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어도,

주님은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믿었다가는 큰 일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 땅에(교회 안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하신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물으신다.

 

2.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믿음은 나의 결단과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그 은혜에 의하여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모든 축복과 은총의 총칭이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을 받고 이 믿음으로 이 은혜에 서 있게 되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손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4-18)

 

그리스도인은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나 형벌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정죄를 받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이후로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은혜의 통치만을 받는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은총만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통차하시고 책임지신다는 뜻이다.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생수를 공급하시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신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결과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주님은 다 아시니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하늘의 계산법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가 들어가 있는 은혜에서, 우리를 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하나님의 은혜를 끊을 수 없다.

사망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권세자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어떤 높은 것도 어떤 깊은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은혜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김을 확신해야 한다.

 

3.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겪는 고난, 낮아짐, 궁핍, 수모, 슬픔, 고통, 위기들은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가 있지만,

세상에 살던 옛 사람의 습관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사람의 그것으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하고 만들어져야 한다.

 

떡으로만 살고 땅의 것만을 추구하던 삶에서, 이제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 말씀으로 사는 법, 하늘의 계산법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난은 믿음으로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기업을 얻게 한다.

고난은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후에 영광으로 영접하게 해준다.

고난 받은 게 유익이라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인내를 온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4)


고난 받을 때 인내가 왜 그리 중요한가? 인내를 통해 연단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단은 용광로에서 금 아닌 잡석들을 녹여버리고 금만을 채취하는 작업이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정제된 순금을 만드시느라고 고난을 주시고 인내를 하게 하신다.

고난을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을 이루어 순금이 정제되어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이 과정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였다.

 

요셉은 억울한 노예 살이 감옥살이의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이 이루어졌다.

모세는 40년 동안 목동 노릇하면서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을 이루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주시기까지 25년 동안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을 이루었다.

 

그 연단 끝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고난의 인내, 인내의 연단 없이 이룬 소망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인 것을 우리는 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그 무너짐이 심한 것을 본다.

 

그러나 고난의 인내와 인내의 연단을 통과하여 이룬 소망은

주추를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비와 창수와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래오래 번영한다.

주님의 말씀이요, 역사가 증명하는 원칙이다.

 

모세가 이룬 소망, 다윗이 이룬 소망, 요셉이 이룬 소망이 그러하였다.

고난 가운데 있는가? 소망이 보이지 않는가?

고난의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된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룬다고 하신다.

건축자들은 쓸모없다고 돌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버린 돌로 머릿돌을 삼으시는 분이시다.

낮아진 자는 높이시고 주린 자는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박국 선지자는,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하였다.

주 여호와가 나의 힘이시고,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난은 말씀으로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받는 우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 말씀하신다.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할 날이 반드시 온다.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날이 반드시 온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고,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고난은 잠시요, 작고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영광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높은 영광도, 권력과 부와 명예의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 세상의 영광을 누리던 자들의 비참을 말하고 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5-17) 


우리 고난의 최후 목적지는 하나님의 영광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고, 최고 최상의 그 영광을 바라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다윗처럼, 요셉처럼 , 모세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가 바라고 즐거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천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쓰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 형상과 같이 변화할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기도 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중간에 아무리 좋아도 끝이 안 좋으면 다 안 좋은 것이다.

고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서 이루는 소망이 우리의 끝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