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2부 6장 바울의 큰 열망 (김영희)

강대식 2020. 2. 5. 20:47

6 장 바울의 큰 열망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우리는 9절을 살펴보면서, 바울은 이 지식이 가장 고상한 첫 번째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에 관한 진리에 있음을 알았다. 이 모든 것, 모든 고상한 지식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완전한 순종의 삶과 대속의 죽음에-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지식들을 상고하면서, 또 다른 지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더 깊은 지식, 바울이 더욱 알고 싶어 했던 그 지식이 10절과 11절에 나온다.

 

1. “내가 그리스도()---알고자 하여

바울의 첫 번째 열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는 마치 끈에 묶인 개가 달려 나가려는 것 같은 간절함이 배어난다. 그 지식을 이해하고 싶어 했고, 그 지식에 붙잡히고 싶어 했다. 이 더 깊은 지식과 관련하여 바울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싶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몇 가지 지식을 더 얻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원하는 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더 많이, 더 친밀하게 알기를 갈망했다.

 

그는 주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그 일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아무 소망도 없고 기댈 데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메섹 길에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본 바울은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는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직접 보았고 그의 음성도 직접 들었다. 주님과 직접 교통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갈망한다고 말한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그 경험을 더욱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기는 힘든다. 사도는 정의상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경험은 그렇게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이고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교제하고 교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믿는다라는 것밖에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갓난아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교제와 생생한 교통을 경험한다.

 

환상도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탐해야 할 것은 이 인격적인 교류와 교제와 교통이다. 감사하고 영광스럽게도 이 경험은 우리도 할 수 있다. 나는 그를 보지 못했고, 음성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그가 계심과 그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혼자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묵상할 때,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신 것을 감지한다.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데도 메시지를 알아 듣는다. 그 분의 격려와 책망도 알아차린다. 사도가 말하는 교제가 이런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알고자 하여오늘날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과 교통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우리도 더욱 교통하기를 갈망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내가 세상 무엇보다 갈망하는 일은 주님을 더 아는 것이다. 내 소유를 다 팔고 지위와 신분을 다 버려서도 더 깊은 지식과 더 참된 이해, 더 친밀한 교통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한다는 점에서 세상 전부보다, 세상 모든 부와 재산과 가능성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하다.

 

2.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다음 열망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다. 흠모하는 이를 만나면 그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이 본능적으로 솟아나게 되어 있다. 주님을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연히 그를 더 닮고 싶어 하게 되어 있다.

 

본문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닮기 전에 필요한 세 가지를 알려준다.

첫 번째가 부활의 권능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담대하고 놀라운 진술을 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그가 살아나실 때 함께 살아났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그에게 속해 있다면,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몸이 되었다면, 그에게 일어난 일은 전부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그와 함께 살아났다.

 

바울은 첫 다섯 장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하고 나서, 똑똑한 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이 의를 다룬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면 마냥 죄를 지어도 그 피로 덮어 주시고 용서해 주실 테니 괜찮지 않은가요?”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설명한다. “로마인들아 이것을 알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함께 죽었다면, 이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와 함께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 3:10에서 말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교리를 아는 자들은 이른바 도덕폐기론에 빠질 염려가 없다. 그 권능은 능히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워서 그리스도와 동행하게 할 수 있다.

 

로마서 7장에서도 이 점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본문의 이 말씀은 롬6-8장을 아주 짧게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은데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아 버린다.(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죄와 사탄과 죽음을 이기신 분, 승리하여 부활하신 분은 능히 나를 건져 내실 수 있다. 나는 그의 권능을 받아 누릴 수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나타난 권능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사람은 그의 강력한 권능이 자기 속에 흘러들어와 자아와 죄를 떨치고 일어나게 해 주는 것, 부활의 권능을 감지한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꼭 필요한 두 번째 요소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왜 기껏 부활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이것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순서이다. 주님을 닮는 사람은 그가 겪으신 일을 자신도 세상에서 겪게 되어 있다. 주를 닮는다는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에 오셨을 때 고난을 받으셨다. 만약 예수그리스도가 완전한 분이 아니었다면 고난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를 닮아 갈수록 그가 받으신 고난도 받게 된다고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10:24-25)

 

주님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세계가 죄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면서 아픔과 슬픔을 느끼셨다. 주님과 주님의 삶에 다가가는 사람 역시 세상의 죄를 보면서 아픔과 슬픔을 느끼게 되어 있다. 분노를 느끼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분노를 느끼신 것이 아니라, 아픔과 슬픔을 느끼셨고 무거운 부담을 느끼셨다. 바울은 이러한 고난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주님이 세상에서 당하신 일을 어느 정도나마 똑같이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의 삶을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요소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되, 필요하다면 주님처럼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에는 세 단계의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은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다.

 

3.“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마지막으로 바울의 궁극적인 열망은 그리스도와 영광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와 더 교통하고 그를 더 닮아 가다가 마침내 영원히 그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9절 칭의 - 10절 성화 - 11절 영화

이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며 변개되지 않는 과정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거룩하게 되지 않거나 영화롭게 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이것이 정해진 과정이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다.

 

언젠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대했던 부활은 둘째 사망과 지옥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부활이 아닌 의인의 부활, 바른 자들의 부활, 영광으로 이어지는 부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지내게 될 부활이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그런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잘못으로 얼룩지지 않는 모습, 점도 티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흠을 찾지 못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영화롭고 완전해질 것이다. 바울은 3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는 만물이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1)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분이 이런 일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영광의 몸을 입을 것이다. 주님처럼 될 것이다. 바울은 무엇보다 이날을 고대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을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한다.(8)

 

그리스도는 완전한 삶을 사셨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여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으며, 지금도 영광 가운데 살아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도 분명 그와 같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알수록 사도처럼 그날을 더욱 사모하며, 다른 것들은 전부 하찮은 쓰레기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눈에 세상 나라와 그 모든 영광이 뭐 그리 대단하게 보이겠는가!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만을, 그 영광에 들어가기만을 열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