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 ---', 6부 갈등과 결별 (고별설교)

강대식 2020. 2. 5. 20:49

 

 6 부 갈등과 결별


1 장 균열의 조짐들

 

1730년대 즉 노샘프턴 교회에서 전임목사요 외조부인 솔로몬 스타다드가 죽은 후 1차 대각성의 절정까지 에드워즈의 목회에 있어 성공의 기간이었다. 설교도 탁월하여 그의 목회의 안전과 미래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위대한 설교자요 거룩한 목회자가 교인들의 배척을 받아 교회를 사임했다.

 

그것은 사례문제, 권징문제, 인간관계 문제로 교회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나 친척의 권징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원만하게 대처하지 못해 친척이나 교인들에게 원성을 받은 것을 보면 인간관계를 무난히 맺어가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딸만 아홉 있는 집에서 외아들로 자란 탓인지 특히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소극적이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 강하고 고집스러움은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2 장 성찬 논쟁

 

에드워즈가 사임해야할 결정적인 이유는 성찬에 참여할 자격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그전의 기준보다 훨씬 높고 강화된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해임의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론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었다.

 

논쟁의 배경

 

1630년 중반 무렵부터 교회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 회중 앞에서 회심체험 진술을 하고 회중의 판단을 받아야 했다. 이것은 교회원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정회원이 아닌 사람의 자녀는 유아세례를 받을 수 없는 문제점을 가져왔다. 그 타개책으로 1662중도언약으로 준회원제를 두어 그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 조치에 의해 회심의 체험을 교회원권의 조건으로 삼는 관행이 뉴잉글랜드지역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 제도에 앞장 선 목사중의 한 사람인 에드워즈의 외조부였던 솔로몬 스타다드는 개방적인 입장에서 스타다드주의로 불리우는 중생하지 않은 자라도 생활에 하자가 없고 교리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교회회원권을 얻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스타다드는 성찬식이 사람을 회심시키는 경향이 있는 은혜의 수단이므로 비중생자라 할지라도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드워즈가 제시한 성찬참여 자격기준

 

에드워즈도 1744년까지는 스타다드가 도입한 것과 같은 조건위에서 성찬참가 자격을 인정했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했음에도 뒤늦게 회심을 고백하고 회심을 고백한 뒤에도 단지 일시적 변화에 그치고 마는 일들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자기 목회 중 약 550명에게 성찬 참여권을 허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속는데 그리고 자기가 세상을 교회에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에드워즈는 마침내 교회에 문제를 제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 처음 도착했던 청교도 조상들이 주장했던 가시적 성도다움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가시적 성도다움이란 가시적 거룩성이란 말고 같은 의미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거기에 상응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 및 하나님의 정죄의 정당함에 대한 시각, 즉 청교도들의 용어대로 겸비해짐의 체험을 포함해야 했다. 아울러 육신과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는 것 그리고 자기부인이 포함되어야 했다.

 

현대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이러한 성찬 참여 자격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으며 심지어 완전주의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반발할 것이다. 어쨌든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은혜와 경건의 고백 및 외양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 정회원권을 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 주장은 에스겔 22:26, 레위기 10:10, 예레미아 15:19, 44:6-8 등의 본문에 근거하고 있었다.

 

가시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볼 때 에드워즈는 교인들의 삶의 모습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에 많이 미달된다고 느꼈음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교회 회원권 취득의 자격요건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입교의 기준을 높여야겠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새 정책은 동네에 물의를 일으켰고 교회위원회도 15명 중 3명만 거기에 동의했다. 에드워즈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하고 교회 위원회에 문서로 약속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을 교회가 읽어본 후 쌍방이 선택한 회원들로 구성된 공의회의 자문을 구한 후 교회가 원한다면 내가 이 교회를 사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겸허한 질의

 

에드워즈의 목회 사활이 걸린 가견적 기독교회에 있어 완전한 회원권과 성찬참여자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들에 대한 겸허한 질의라는 긴 제목의 책이 발간되었다. 에드워즈의 주장의 요지는 온전한 자격을 갖춘 자들만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며 기독교적 판단자들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을 강조했다. 내면적 경건은 측량할 수 없지만 내면적 은혜의 외적 표현이야말로 참된 회심에 대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다.

 

참된 회심은 틀림없이 생활과 인격의 가시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 가시성을 판단할 것인가였다. 에드워즈는 자신은 판단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은 목사가 자신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결과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해임결정

 

1749년 가을. 반대자들은 논쟁을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마을 회의인 지역 회의로 가져갔다. 교인들은 만일 목사가 자기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임해야 한다는 해결책에 합의했다.

 

에드워즈의 여러 가지 권한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국 1950619일 노샘프턴에서 회중들이 초청한 다섯 교회 목사, 다섯 명의 평신도 대변인들 그리고 에드워즈가 초청한 다섯 교회 목사, 네 명의 평신도 대변인들로 구성된 공회에서 해임이 결정되었다. 그 직후 공의회는 교인들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공동회의를 소집했다. 230명의 성인 남자 회원 중 23명을 뺀 절대다수가 그의 사임을 원했다. 공의회 회원인 데이비드 홀은 자신의 일기에서 그 결정에 대한 에드워즈의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얼굴에서 최소한의 불쾌한 빛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다웠다. 그의 행복은 그의 대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해임하지 않으면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던 많은 이들조차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에드워즈를 특별히 괴롭게 했던 것은 그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었던 교인들의 반대였다. 외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들은 너무나 미혹되어 그를 반대하는 열심이 일종의 미덕인 것처럼 생각했다.

 

3 장 검허한 질의

 

1. 질의를 공시하고 설명함.

 

[검허한 질의]3부와 부록으로 이루어진다.

1부는 질의를 공시하고 설명함이란 제목하에 고백과 외양에 있어 기독교적 은혜와 경건을 부여받은 자들 외의 어떤 이들이 기독교 성례 특히 성찬에 허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2.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유 열한 가지

 

2부는 성찬 참가 자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으로 제1부에 제기된 질문에 대해 부정적 결론을 내리는 이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견적 성도들과 신앙고백하는 성도들, 혹은 가견적이고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가견적 교회의 회원으로 영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정적 배후에는 에드워즈의 치밀하고 엄격한 신학적 관점이 깔려있다.

 

첫째,‘가시성에 대한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가시적 경건성을 소유한 자들과 단지 가시적 도덕성만을 가진 자들을 구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일반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함으로써 참된 신앙을 명시적이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라고 주장한다(6:13,10:20의 맹세하라에 근거). ‘그 이름으로 맹세라는 제도의 의도는 하나님과 공적으로 언약을 맺는것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 2가지를 엄숙히 고백했는데 하나는 신앙이요, 다른 하나는 순종이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스타다드의 참 성도와 위선자들의 구별은 복음교리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도덕성 신실성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왜 그 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고백하듯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그 분에 대한 적절한 존경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가라고 도전한다.

 

3. 20 가지 반론들에 대한 답변

 

3부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20 가지 반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첫 번째 반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학교로서 사람들을 받아들여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곳이므로 다른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학교임을 인정하나 입학자격도 갖추어지지 않은 자들을 받아 그 자격부터 구비시켜준다는 의미의 학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을 참으로 주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는 자들은 믿음에 의해 마음이 정결케 된 자들뿐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반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가시적 경건과 먼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렀다. 에드워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시적 성도성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신실성도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에도 악명 높고 노골적으로 사악한 자들을 성찬에 허입해야 할 것인가라고 반박한다.

 

세 번째 반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의 경건 고백을 하지 않았으나 참여할 자격으로 죄 범한 자가 성찬에 나오고자 하면 죄를 자백하고 회개의 가시적 표지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동일한 입장이라고 대답한다.

 

네 번째 반론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은 무리들은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고백했다거나 참된 경건의 가시성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자백하면서’(3:6) 나아왔고,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였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반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으니라’(20:16)는 말씀은 가견교회 속한 자는 많으나 참된 성도는 소수라는 것이라 주장했다. 에드워즈는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음에 초청받은 자이며 택함을 적게 받았다는 것은 가견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섯째 반론은 마 13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 조치를 쓰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곱 번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유다가 은혜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성찬을 제공하셨다. 에드워즈는 유다가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지만 주의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고 주장한다.

 

8~10번째 반론은 확실성과 가시성의 차이점을 말하였으나 에드워즈는 중요한 것은 양심적인 신앙고백이라 주장하고 열 번째 반론은 심사를 까다롭게 할 때 목회의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에드워즈는 설사 연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곤혹스럽더라도 쉽게 허입된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강팍함이 극복되는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가치가 있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11~13, 20번째 성례의 자격요건들, 목적과 효과들에 대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떤 예배의무에는 얼마든지 참석할 수 있지만 성찬에는 허입될 수 없다. 설사 성찬이 회심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더라도 거기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불신자가 구원받는 것이 우주의 지고한 가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14~19번째 반론은 신앙고백의 성격에 관련된 것으로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을 교회에서 완전 몰아낼 수는 없다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어두움과 꼼꼼함 때문에 몇 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에 머무르게되는 것이 중생하지 않은 많은 자들을 교회 안으로 몰려들게 함으로써 교회 전체와 그 자들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했다.

 

4 장 성찬 논쟁에 대한 현대적 평가

 

에드워즈는 성찬 참여 자격에 대한 잘못된 기준은 세상과 교회의 차별성을 제거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성찬 지원자가 구원 얻는 신앙혹은 성화시키는 은혜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앙고백과 삶에 있어 가시적 성도다움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즈가 요구한 경건의 고백은 자신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는 약속, 자신과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원하는 온전한 헌신의 약속을 포함했다. 노샘프턴 교인들이 볼 때 비현실적이고 과도히 높은 기준이었다. 그것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청교도 1세대와 2세대들이 살던 17세기에나 존재하던 까마득한 옛날의 제도를 연상시키는 제안이었다.

 

진정한 회심과 거짓 회심의 구분은 에드워즈의 평생 과제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교인들을 은혜와 체험과 구원의 확신 속으로 인도하는 일을 목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종교적 정서]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삶을 사는 것과 참 은혜 받은 자의 삶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강조했다. 회심의 은혜와 상관없는 도덕적 삶은 인간 노력의 산물이요 성령의 특별한 역사의 결과가 아니므로 그것이 성도의 표시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18세기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인들이 직면했던 갈등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그대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현대 개신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본다. 결과적으로 현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변화의 기준이 너무 낮다. 문제는 회심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 할 때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회심된 것으로 볼 것인가.

 

한국교회로서는 에드워즈의 기준이 과도히 높은 것임이 객관적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기준에 대해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여러모로 낮아져 있기 때문이다. 세례 기준, 입교 기준, 직분수여 기준, 목사후보생 기준, 목사안수 기준 등이 일반적으로 너무 낮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 타락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에드워즈의 기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정신에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예, 교회의 명예 그리고 복음의 영광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 사이의 논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이다.

 

 

5 장 고별설교

 

1750710일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에서 고별설교를 전했다. 수년간 교인들과의 격렬한 논쟁 끝에 23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떠나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기회였다.

 

제목은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공적으로 거부한 후 노샘프턴 제일 교구에서 행해진 교별 설교라는 긴 것이었다. 본문은 고후1:14로 에드워즈는 목사들과 그들의 교인들은 심판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만나야 한다는 교리를 제시했다.

 

어떤 식으로 만나는가?

마지막 날 목사와 그 교인들은 특별한 일을 가지고 분명하고 확실하며 무오한 빛 속에서 만나게 된다고 선포했다. 에드워즈는 최선을 다한 자신의 복음적 설교사역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 강퍅한 사람들이었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이것은 자신의 견해가 오류였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엇을 위해 만나는가?

 

마지막 날 그러한 특별한 만남은 그들이 지상에 살고 있던 동안 그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던가를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보고하기 위해 만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정말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철저하게 규명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기 위해

 

특별한 만남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목적은 그들이 세상에 있었을 때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란에 대해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기 위해 선다고 주장한다. 신실한 목사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상급이 있을 것이며(12:3)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을 악하게 대한 사람들은 엄중한 벌을 받게 될 것(10:14-15)이라 선언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신실한 목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마도 교인들은 설교자가 강단을 이용해서 쓴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자신의 동기의 순수성과 성실성을 자신있게 회고했다.

 

적용

 

첫째,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둘째, 다툼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셋째, 교리적 오류를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넷째, 기도를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후임으로 오는 목사는 건전한 교리를 견지하는 인물이며 진지한 신앙의 인물일 것을 강조했다. 에드워즈 목회의 최대 강조점은 체험적 회심이었다. 그는 청교도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것이다.

(PP 573-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