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 최종목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 바울이라는 한 인물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모든 면에서 세상 역사에 우뚝 솟아있는 지성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론적인 흥미로 사도를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상태와 현 위치에 대해 중요한 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이자 독보적인 사도였던 것은 맞지만, 그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은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 있으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경험 역시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경험에 발생하는 어려움 가운데 다수가 교리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여기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에 대해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 사도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1. 잘못된 견해로서
① 첫 번째 견해는, 바울이 구원을 확신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는 바울의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닌가? 그는 마침내 구원받기를 바랐을 뿐, 구원받았다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성경의 중대한 원리와 곧바로 충돌한다. 어려운 본문을 만났을 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살펴보지 않고 그 본문에만 근거해서 교리를 끌어낼 위험이 늘 있다. ‘사도가 사용한 표현은 그가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 넘치는 확신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과 자신이 얻는 신분을 밝혔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 함이라”(고후1:12),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니”(빌1:6) 이렇게 빌립보서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서신을 볼 때, 이 본문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해서 쓴 말로 해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② 또 다른 견해는 바울이 구원을 확신했다는 데 동의하나, 단순히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지만 아직 인생 여정이 끝나지 않아서 최종적인 부활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뜻에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우스운 견해인 것이 분명하다. 사도가 고작 “난 아직 살아서 인생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라는 말이나 하려고 빌립보에 편지를 쓴 셈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살아 있으니까 이 편지를 쓴 것이다.
2. 사도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바울이 10-14절에서 주로 하는 말하는 바는 세 가지이다.
1)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붙잡으셨고 지금도 붙잡고 계신 것은 특별한 목표에 도달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께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혔고 지금까지 붙잡혀 있다고 말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리스도는 이 특별한 이유 때문에 바울을 붙잡으셨다.
주님이 바울을 붙잡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그의 죄를 사하시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주님이 바울을 비롯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특별한 목표에 도달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를 충분히 온전히 알게 하시고, 그를 닮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다.(10)
그는 디도서 2:11-14에서도 이 진리를 가르쳤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자기 앞에 있다고 말한 목표, 자신이 잡힌 바 된 이유라고 밝힌 목표는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와 온전히 교통하는 것이었다. 죄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와 오염에서도 구원받는 것,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 범사에 그와 같이 되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 목표를 향해 가게 하시려고 어느 날 오후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바울을 붙잡으셨다. 그 후 이것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 이 사도의 열망이 되었다.
2) 그런데 아직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고 있는 목표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함으로 알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삶과 생활을 닮는 것- 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이었다.
3) 이처럼 자신을 붙잡고 있는 목표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에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며 그 일을 위해 온힘을 쏱는다는 것이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달려가노라”
- 적용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온전해질 수 없다. 그렇게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15절에서는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15절 “온전히”는 제한적인 단어로서, 사도는 이 단어를 여러 곳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고전2:6) 여기에서 ‘온전한 자들’이란 어린 자들에 비해 좀 더 성숙한 자들을 가리킨다.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다. 그에 비해 본문의 “온전히”는 절대적으로 온전하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나는 아직 온전해지지 못했다.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온전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에서 온전케 하시지 않는 건가?”라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모른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온전케 하셔야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기로 하셨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① 이 땅에서는 죄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우리를 낮추어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함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시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실패하고 불완전함을 느낄 때 하나님과 교통한다.
② 세상에서 이미 온전해졌다는 주장은, 첫째로 그들은 자신을 제대로 검토해 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행동뿐 아니라 마음 상태에도 온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오류는 기준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사도의 기준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교통하고 교제함으로써 그를 아는 것이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만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꾀하지도 않고 건드리지도 않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는 부활의 권능, 죄의 모든 오염과 권세와 죄책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준이다.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 이 기준에 이미 도달했다고 정직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온전케 되는 일과 완전한 성화는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완전주의를 가르치는 자들은 어느 한 순간 온전해질 수 있다고 설득한다. 사도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달려가노라”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갑작스러운 요소가 없다. 사도는 앞으로 나아가며 전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온전함에 이르는 방법은 “달려가”는 것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3) 이 일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에는, 우리도 가만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완전주의를 가르치는 자들은 거의 항상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난 사도는 반대로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쓴다. 딤전6:12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의와 칭의의 영역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일단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은 후에 성화를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단계에서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한다.
4)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을 빼앗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확신의 토대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오직 바울처럼 고백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자요 생명을 가진 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자신의 큰 열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으며, 이런 것에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가진 자임이 분명하다. 진리의 빛에 비추어 자신을 살펴볼 때, 여러분도 바울처럼 아직 얻지 못했고 이루지 못했고 붙잡지 못했다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며 앞으로 더 달려 나가길 소망하게 되는가? 이런 열망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 질문
우리는 우리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고, 셋째 하늘에 올라 본 사람이요 주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사도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바울은 앞으로 달려가려 했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자, 이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중대하고도 긴요한 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자신이 그 의도에 미치지 못함을 안다. 그 의도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하나님이 완전주의라는 거짓 교리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기 원한다. 바울이 분명하게 입증한 이 원리, 궁극적인 기준에 대한 깨달음, 그것을 향한 갈망, 거기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려는 결심을 우리 속에 심으시고 자라나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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