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9장 믿음과 행동 (김영희)

강대식 2020. 2. 19. 09:40

9 장 믿음과 행동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이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5-19)

 

- 바울은 언제 어느 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였기에 그의 관심은 어떻게 빌립보 교인들을 도울까 하는 데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요약함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본문을 다루는 중대한 주제는 신앙과 실천, 믿음과 행위의 관계이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서 생각(마음 mind)은 사도가 즐겨 쓰는 단어다. 단순히 흥미를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그 일에 대한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성숙한 어른의 상태에 이른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보가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올바로 믿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주된 오류가 두 가지 있다고 경고한다. 첫째, 유대교의 오류이다. 유대교는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혈통이나 교육이나 민족을 의지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둘째, 완전주의이다. 완전주의에는 이른바 도덕폐기론이 거의 항상 따라온다. 스스로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믿으며, 죄나 결함이 드러나도 거리낌 없이 변명하거나 별 문제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자들이 초대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므로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했다. 이것이 도덕폐기론의 핵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지니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라고 경고한다.

1. 우리 신분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라는 뜻이다.

유대교인과 완전주의자들의 덫을 단번에 물리치고 저 앞에 있는 푯대와 상과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항상 교리와 믿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신분의 토대와 기초를 제대로 모르면 그리스도인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의 기초는 성경의 가르침에 있기 때문에 견고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믿음에 일치하는 행실이 있어야 한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옳고 바르다고 동의하는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바른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모든 서신에서 이야기한다.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바울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핵심교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교리는 이견이나 재론의 여지가 없도록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신앙에 명쾌하지 않은 측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신앙과 신앙의 삶을 놓치지 말라. 너희가 확실히 알고 있는 핵심교리를 실천에 옮겨라. 그러면 그 밖의 문제들은 하나님이 알려 주실 것이다.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을 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례의 형태라든가, 예언적 가르침에 대한 해석은 전 천년설이니 후 천년설이니 무 천년설이니 하는- 명쾌하지 않은 문제들도 있다. 얼마든지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이것이 두 범주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리들은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제들도 있다. 이 두 범주를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의 핵심이다. 본질적인 문제를 비본질적으로 취급하거나, 비본질적인 범주의 문제를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말라. 이 점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탓에 교회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모른다. 유대교를 멀리하라! 완전주의를 멀리하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러분이 확실히 알고 있는 바대로 행동하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교리들을 실천에 옮기라! 대부분의 이단과 교회의 부적절한 분열은 바로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즉 핵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절대적인 것과 분명치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3. 좋은 예를 본 받으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는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늘 교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빌립보교인들을 돕기 위해 그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론적인 가르침을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거기 담긴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나를 본받으라. 나를 비롯한 여러 선생들을 본받으라여기에서 말하는 선생 중에는 2장에 등장하는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빌립보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사도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자만심의 발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은 후, 그를 기쁘시게 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쳐 온 이 사람에게는 자신을 본받고 닮으라고 말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실제로 바울보다 더 겸손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달려가노라라고 한 다음, “너희도 나처럼 살길 바란다. 나는 내 삶이나 내가 이룬 것들에 만족치 않고 푯대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를 본받으라. 나처럼 살아라. 나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처럼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 아닌가? 성도들의 생애나 훌륭하고 경건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야말로 최종목표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가장 유익한 방법 아닌가? 전기를 읽으면 진리가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 배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전기를 읽고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유익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4. 나쁜 예를 보고 경각심을 느끼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좋은 본보기를 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쁜 삶의 예를 관찰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경이 나쁜 예들을 기록해 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경건치 못하게 살았던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된다. 교회사를 살피면서 긍정적인 예와 부정적인 예들을 찾아보라. 사도는 여기에서 성공적이고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게 확신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한다.

 

- 바울의 신앙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 교리

1. 확실한 사실은, 언제나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도와 동료들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에 맞는 삶을 살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명확한 진리를 깨달았고, 그가 붙잡은 진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달려가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합당치 못한 삶, 마침내 멸망할 삶을 사는 것 또한 믿음의 결과물이다. “땅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세상과 세상의 삶이다. 바울은 그런 자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런 부끄러운 삶을 사는 까닭은 땅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과 신앙이 행동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 현대세계가 이 사실을 뼈아프게 입증하고 있으며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대다수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교육이나 문화나 그 밖의 대책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는 기독교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기독교의 교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해 온 데 있다. 기독교 윤리는 붙잡는다. 산상설교는 기꺼이 칭송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에는 귀를 틀어막는다. 이처럼 세상은 어리석게도 기독교 교리는 무시한 채 기독교 윤리의 좋은 점만 고수하면 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십계명을 지킬 필요를 못 느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십계명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짓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율이다. 신앙이 행동을 결정한다. 현대세계는 이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풍성히 보여 주는 사례들의 전시장이다.

 

2.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의 본질과 가치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지표이다.

한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다.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믿음에 걸맞은 것인지 확인해 보라고 계속해서 권면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스도가 세상 나라에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죄에 계속 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심각한 모순이다. 사도는 세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신앙과 믿음은 헛것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6:7) 그들의 믿음과 신앙고백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 최종적으로 증명하고 입증해 주는 것은 결국 그들의 행동이다.

 

3. 한 사람의 믿음과 행동을 궁극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금석은 십자가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가?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이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직 십자가만 나를 구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친구이다. 이 말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덜어내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이다.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부 십자가의 원수이며 십자가의 영광을 훼손하는 자들이다.

 

또한 행동으로도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있다고 사도는 말한다. 탐욕과 정욕과 육신의 본성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위해 사는 자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된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지적한다. 십자가를 말하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면서도 부도덕하게 사는 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비웃게 만드는 원수라는 것을 행동과 행실로 나타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목적과 역할을 실제로 부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사람들을 죄와 허물과 부끄러움에서 건져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선한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죄에 매인 삶을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인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십자가야말로 나의 믿음과 행동,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검증하는 마지막 시금석이다. 십자가를 우리 삶의 시금석으로 삼을 때에만 방황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내 행동은 곧 내 믿음의 진술이요 내 믿음의 선포이다. 십자가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면 믿음과 행동을 최종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믿음과 행동이 하나로 통합된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