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5/10 주일설교, '믿음의 시련', 약 1:2-4

강대식 2020. 5. 10. 20:48

2020-05-10 주일설교

본문: 1:2-4

제목: 믿음의 시련

 

1.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주시는 믿음의 시련이다.

 

미혹을 받아 받는 시험은 욕심의 산물이고 결과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베드로 사도도 죄로 오는 고난과 믿음의 시련을 구분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21)

 

내 욕심으로 인해 오는 고난, 죄로 인해 오는 고난은 기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그것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도록 주신 시험이고 고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는 죄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일단은 모든 시험은 회개의 성질로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아들들에게 하시는 징계는 다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8,11)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믿음의 시련으로 주시는 것을 말한다.

시험이라고 하고서 곧이어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고 있다.


뜻이 있고 목적이 있어서 오는 고난 즉 시험은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과 징계 어느 쪽도 견디기 힘들고 시험에 들기 쉽다.

그런데 그냥 기쁘게 여기라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이는, 그 결과에 대한 확신 없이는,

설천하기 힘든 명령이시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떡으로만 살고, 땅에다만 보물을 쌓고, 자기 나라, 자기 왕국, 자기 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진리요 명령이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들만이,

믿음의 시련 앞에서 온전히 기뻐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믿음을 선물로 받아 믿음 생활하면서도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성화의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라가라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사는 경건의 훈련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 필요하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육체의 연단의 유익은 아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러나 경건의 연단의 유익은 내생은 물론 금생에도 유익한 것을 잘 모른다.

경건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지속적으로 유지됨을 의미한다.

말씀은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할 영의 양식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실천하게 한다.

광야생활을 통해 우리를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것은, 즉 시험하고 시련을 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믿음도 말씀에서 나고 말씀을 통해 자란다.

성경과 함께 경건서적을 읽는 것이 경건훈련에 있어서 가장 좋은 은헤의 방편이다.

 

말씀과 경건서적을 읽지 않고서는 경건에 이를 수 없고, 영의 기도를 할 수 없고,

믿음의 시련 앞에서 온전히 기뻐할 수 없다.

돈과 일을 위해 쓰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 성경과 경건서적 읽기에 바치기 바란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와 청교도아카데미 카페에 오시면 경건서적의 요약들이 쌓여 있다.

 

2.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1:3)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 시험들이 믿음의 시련인 것을 알고, 인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임을 알면,

그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낙심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믿음의 시련을 줄 때마다 원망하고 대적하였다.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못하면 가나안도 천국도 들어갈 수 없음을 몰랐다.

애굽에서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버리지 않으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왜 주지 않고 시련만 주느냐고 하였다.

 

가나안을 들어갈려면, 천국에 들어갈려면,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도 같은 뜻이다.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멸망하였다.

출애굽 2세들은 가나안 땅에서 멸망하였다.

속사람이 말씀으로 바뀌지 않으면, 광야에서건 가나안에서건 결과는 동일하다.

 

환경만 좋아지고, 부자만 되고, 되면 출세만 하면 될 것 같지만,

결국 그 사람이 몰락하고 패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이요 속사람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사울 왕과 솔로몬 왕이 대표적이다.

갑작스런 선택으로 또는 아비 덕에 왕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겸손의 외양을 갖추다가 왕 노릇에 익숙해지니까

속의 본성이 나와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욕심대로 살다가 우상숭배로 멸망하였다.


믿음의 시련은 바로 인내를 통해 속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요셉의 13년간의 믿음의 시련, 모세의 40년간의 믿음의 시련,

그 시련의 인내를 통해 위대한 요셉, 위대한 모세를 만드셨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안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이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의 다른 표현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 낸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내는 것을 알면,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련의 목적과 결과를 모르면 원망 불평 낙심 대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 두령들과 밤새 통곡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닮은 꼴이 될 수 밖에 없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알았고 믿었다.

 

연단은 금강석에서 금을 뽑아내는 용광로의 작업을 의미한다.

옛사람과 그 행위는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시련의 인내는 모세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들어 냈다.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소망을 이루게 하였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며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냈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었고, 소망을 이룬 모델이요 본보기이다.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믿음의 시련을 주고 있다.

 

3.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4)

 

믿음의 시련 가운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참다가도 못 참아서 그만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경험을 한다.

 

성령의 열매에 네 번째에 오래참음이 있어요,

성령을 힘입어야 우리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하면서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힘입어야 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우리 성품의 온전도 능력의 온전도 이루는 것을 본다.

다윗이 마음의 온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이스라엘을 잘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빨리빨리문화는 여러 가지 성과도 내지만, 지나치면 모자랄 수 있다.

우리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하는 성품의 온전함만은 빨리빨리로 될 수 없다.

오랜 기간의 믿음의 시련과 오래참음이 아들의 형상을 닮고 이루어가게 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

아들의 성품으로 만들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예비하신 일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품도 온전히 주님을 닮아가게 된다.

믿음의 시련은 오직 이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면서 이 길을 가야 한다.

 

이 길은 문도 좁고 길도 협착하여 찾는 이도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길이다.

넓은 길 큰 문은 많은 이들이 가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개혁자들은 이 좁은 길을 가다가 카톨릭 교도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영국에서는 1662년 검은 성 바돌로뮤의 날에 2천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통일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교구와 사택과 십일조 월급을 포기하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서 이 좁은 길을 걸어갔다.

 

이 길은 우리 주님이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한 길이다.

구원도 피흘림이 없으면 이룰 수 없고,

개혁도 피흘림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운다.

죄도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이길 수 있다.


또한 인내는 기다릴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 줄 알라고 하신다.

믿음의 시련을 주셨을 때, 기다릴 줄 모르고, 그 해결책만을 찾는 사람들은

결코 이 생명의 길, 좁은 길을 갈 수 없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려면 개혁자들처럼 청교도들처럼 말씀 공부에 몸과 열심을 바쳐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기 때문이요, 성령이 역사하시는 순전한 말씀 공부만이,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말씀이 자기에게 영이 되고 생명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교리도 헛것이 되고 만다.

 

우리 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을 씻어낼려면,

그래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지 않을려면, 순전한 말씀 공부에 헌신하시기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