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이같이 큰 구원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 히브리서 2장 첫 네 주절의 주제를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3) 라고 말한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고 입증하신 메시지이니 유념하라고 말한다. 이 복음을 잘 들으라고, 이 복음을 등한시하면 무서운 결과가 뒤따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소극적인 권면을 하는 데서 더 나아가, 복음은 “이같이 큰 구원”이기에 잘 들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정당한 필요에 집중하기 전에 신약성경이 펼쳐 보여주는 이 큰 복음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행복을 찾는 가장 좋은 길은, 복음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행복 자체가 아닌 복음의 진리를 먼저 추구하는 것이다. 복음이 주는 바를 얻으면 행복은 물론이요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다른 축복도 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복음이 큰 것은 그 목적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복음은 능히 우리 같은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붙들어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몇 가지 도움을 주시다가 죽을 때 지옥에서 구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을 죄에서 정결케 하시는 것이며, 온 우주를 대속하시는 것이다.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 엄청난 미래와 놀라운 구원의 상속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그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거의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온 세상의 주, 만물의 창조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그렇지 못함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오직 그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하신다. 예수는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자 지휘관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 계획을 맡기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초림의 전적인 이유와 의미는 죄로 가득한 인간을 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는 이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서 다스릴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계획이요, 큰 전망이요, 큰 구원인가!
- 그처럼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천사보다 못한 한낱 인간 예수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그토록 낮아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처럼 예수께서 그토록 높으신 분이라면 왜 굳이 인간이 되셨느냐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서 2장은 이 질문에 대한 상세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큰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시 살펴보려 한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심으로써 이 일을 하시며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야말로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께 합당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1. “합당하도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어울리며 부합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맞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대답은 기독교의 구원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질문을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며, 우리의 궁극적 문제와 난관과 의문에 대해 성경이 항상 제공하는 열쇠가 이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풀고 싶을 때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성품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이 종종 난관에 부딪친다. 즉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생각을 하는 즉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취한 행동(자신이 거룩한 땅에 있음을 알고 신을 벗는 행동)을 따르게 된다. 이처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이런 질문에 다가서면 난관의 절반이 사라져 버린다.
합당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자체로 옳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숙고하며 그 안에서 살고자 애쓸수록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이것이다. 믿음의 가장 좋은 정의는 ‘내가 이해한 바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한 바에 만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이런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지적 교만을 꺾고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 말은 우리가 아예 묻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인데, 우리는 절대 그렇지 못하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에 만족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할 것을 성경은 권면한다.(창18:25)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옳은 것을 알기에 다만 엎드려 감사드릴 뿐이다.
1) 구원 방법은 하나님의 모든 측면과 본질과 성품과 본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흠 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이 모든 내용을 다루는 히브리서 2장이 첫 번째로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에게 합당한 방법이라고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최고 통치자시다. 하나님은 마땅히 순종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만물은 우주의 큰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받으셔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그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은 규탄 받고 정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죄를 규탄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구원 방법, 십자가를 통한 방법으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만큼 죄의 전적인 무서움을 보여 주는 것은 없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을 비교해 보라.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죄는 오직 십자가로만 처리될 만큼 끔찍하고 무섭고 심각한 것이다. 죄를 규탄하고 폭로하며 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다. 이 구원 방법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것이다.
2) 이것은 하나님의 크심에 부합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그의 공의와 의에도 부합하는 방법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경건치 않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의롭다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가 인간을 용서하시면도 공평하셔야 하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셨다고 말한다. 그 해결책은 오직 한 가지, 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그의 본성과 성품이 표현된 것이기에 마땅히 준수되어야 한다. 그의 공의와 의가 그것을 주장한다. 거룩하지 못한 것은 거룩한 것과 공존할 수 없다.
공의와 의와 거룩하심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죄를 사하시는 방법은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 그 형벌이 죄 없이 순결하고 거룩한 다른 이에게 부과됨으로써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자신의 공평함을 지키는 동시에 경건치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3) 큰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의 크심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입증할 뿐 아니라 그의 율법도 굳게 세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율법을 굳게 세우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
4) 또한 이 큰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완전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죄만 사해 주길 원치 않으시고, 태초에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장성한 자녀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세우셨다. 그러나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
① 첫 번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이행하는 것이다. ② 두 번째는 계속해서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하는 마귀를 처리해야 한다. ③ 세 번째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진 빚을 청산하고 정리하는 것이다. ④ 네 번째는 인간을 집어삼키고자 달려드는 ‘쏘는 것’, 즉 죽음도 정복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죽음을 피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 우리 대신 나아가 간구해 주실 대제사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새 본성을 주실 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알고 확신할 때에야 비로소 그분 앞에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삶과 그 유혹에 맞서도록 도와주실 분, 나를 동정해 주실 분, 곤궁하고 무력한 나를 지원해 주실 분 또한 필요하다. 강한 팔로 나를 지켜 주시고 붙잡아 주실 분, 결국 하늘의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해주실 분이 참으로 필요하다.
2.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처럼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일들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껏 말한 우리의 모든 필요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와서 죽으심으로, 그 모든 일을 당하심으로 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다.
1) 그는 사람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율법을 만족시키셨다. 구원은 이런 그리스도의 의가 곧 나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지키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그리스도 안에 두고 그의 의를 네 위에 두었으니, 이제 그 의가 너를 덮어 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 ”여자에게서“ 나셔야 했고 ”율법 아래에“ 나셔야 했다.(갈4:4-5)
2)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사탄과 싸워 그를 정복했다. 사탄이 찾아와 시험할 때마다 패배시켜 달아나게 하셨다. 성자가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이 일을 해 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3) 우리가 갚아야 할 빚도 십자가에서 다 갚아 주셨다.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 주신 것이다. 이처럼 그가 빚을 청산하시고 율법을 이행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그가 인간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죽으실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빚에 매여 있을 것이다.
4) 그는 죽음도 정복하셨다. 죽음은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는 죽음을 뚫고 나가 승리하셨다.
5) 그는 우리를 대신하는 큰 대제사장이 되어 하늘에 오르셨고,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가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우리는 성령으로 태어나 그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벧후1:4) 성령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롬8:15)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삶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신다.
6)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모든 일에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동정하시고 참아 주시며, 인도하시고 힘을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7) 그뿐 아니라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 “이같이 큰 구원”은 이처럼 오직 아들이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같이 큰 구원”은 하나님의 크심과 공의, 그 계획과 방법의 완전성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또한 최고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하는 진정한 척도는 영원한 영광에서 갈보리 골짜기 사이의 거리이다. 그 거리를 헤아려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지 말라.
“이같이 큰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요, 하나님의 성품 전체를 계시하는 방법이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큰 구주신가! 여러분은 이 구주를 알고 있는가? 이처럼 구주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가 여러분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 그를 바라보라. 그를 믿으라. 그에게 굴복하고, 그에게 자신을 드리라. 그를 힘입어 살며, 그를 위해 살라. 그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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