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좋은 삶', 1장 가까이 있는 좋은 삶

강대식 2020. 7. 15. 21:09

스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좋은 삶

 

오래된 한 책에서 비롯된 좋은 삶이 있다

 

좋은 삶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생각나는가? 스포츠 카와 대궐 같은 집이 생각나는가? 대의로 불타는 행동, 사회 참여 또는 더 나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이 땅의 대의명분에 열중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자신의 삶과 환경 그리고 영원한 운명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믿음인가?

 

현대적인 삶과 반드시 분리될 필요는 없으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사람을 고양시켜 주는 오래된 한 책에서 비롯된 또 다른 삶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좋은 삶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길이다. 이 삶에는 희생과 곤란과 노고가 뒤따른다. 이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그리고 타자 중심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이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고 성경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삶 외에 사람의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8세기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교구에서 사역한 에드워즈는 설교와 신학 저술들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인류를 위해 의도하신 신나는 삶에 대해 탁월하게 설명해 주었다. 에드워즈의 글을 읽는 것에 투자한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영적 보상은 엄청날 것이다.

 

 

1장 가까이 있는 좋은 삶

 

에드워즈는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가슴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려는 갈망으로 불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에드워즈가 누렸던 평강과 행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양심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거스르며 행동함으로 끊임없는 갈등 속에 살아간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만든 창조주와 자신을 위해 창조주가 목적하신 계획에 거스르며 살아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큰 열정을 젊을 때 갖게 된 에드워즈는 사람은 참되고 지속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함이 인간 지성에 있는 균형 있고, 일관성 있고, 의미 있는 세계관에 대한 갈망과 인간 마음에 있는 기쁘고, 소망이 넘치고, 변화된 실존에 대한 영적 굶주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요컨대, 에드워즈는 단순하면서도 사활이 걸린 진리를 발견했다. , 하나님은 사람이 비참하게 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끝없이 즐거워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기쁨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더욱 행복해지고, 믿음의 삶을 살아감으로 가장 감미로운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 모두가 결합되어 좋은 삶을 형성한다.

 

어둠 속에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자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이며 영구적으로 바꾸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의 가슴에 좋은 삶에 대한 불을 지피는 설교를 했다. 에드워즈는 영광스러운 위엄으로 충만하고, 결코 길들여질 수 없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삶은 결코 재미없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신앙을 실천하는 우리의 방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잔뜩 찡그리고 굴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초월적이고 견고하고 시들지 않는 만족을 찾기를 원하신다.

pp 24-32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최고로, 최선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을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최고로 그리고 최선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지혜와 진리의 원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 사랑은 도리어 자신을 파멸시킨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덕스러운 삶이 주는 희열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사는 대신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정한 길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삶이다.

 

에드워즈는 행복과 순종을 분리시키는 것도 거부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덕의 실천이 사실상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과 피조물을 사랑하는삶을 사는 사람이 참된 미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참된 미덕은 존재 보편에 대한 마음의 동의, 성향, 연합이다. 미덕과 행복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영혼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한 바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덕스럽게 행동할 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행복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갈망과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미덕과 자기 보존은 충돌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하고 덕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의도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삶을 살 때, 그리고 이에 맞춰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이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덕 없는 삶을 살고 이기심을 따라 행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기독교는 행복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은 덕스러운 삶은 행복을 희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참되고 영구적인 행복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을 송축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의 통로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게 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pp 40-42

 

역설적인 가르침

 

행복에 대한 에드워즈의 가르침은 역설적인 가르침을 꽤나 담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심오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복지를 이기적으로 추구하려는 본능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이익의 추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고, 인간적으로 자신이 꿈꾸던 삶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내세에서 행복을 누리길 원한다면, 그리고 이 땅에서도 행복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넘겨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인생의 열쇠를 예수님께 넘겨 주는 사람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인도와 안내를 신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지시해 주시는 길이 어떤 길이든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이 신자이다.

 

길이 험난할 수 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근본적인 선물은 어려움과 도전 없는 평안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뿌리를 둔, 좋고 나쁜 온갖 상황을 초월한 심오한 행복이다. 이것은 분위기나 고양된 감정을 넘어 지속되는 그런 행복이다. 이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뿌리를 둔, 불굴의 담대한 행복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으로 주어진 깊은 만족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인식은 있으나 복음의 위대함과 자신의 존재 전체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행복과 기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신이 행하고 하나님을 섬길 때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자가 겪는 불편한 긴장

 

우리 가운데 아주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심한 긴장 속에 있다.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더 좋은 계획과 뜻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계획과 욕망의 성취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환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역설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따름으로써 행복해진다. 더 나아가 순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이 원하던 행복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워 주신 의무 속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참된 행복을 발견한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이기적인 정신과 반대된다는 설교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고 권면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랑을 준 사람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게 증가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려고 애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바지하는 일을 우리 자신의 일에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2:21).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장 주된 목적으로 삼도록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한, 자신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살아간다(1:21).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12:2).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모든 일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6: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신적인 사랑 또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 사랑을 넘어가는 것이다. 질적으로 훨씬 높고 고귀한 사랑이다. 자기 사랑이 생래적인 자연적 원리의 요약인데 반해, 신적인 사랑은 초자연적인 원리에서 비롯된다. 이 신적인 사랑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흙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지 않는다. 신적인 사랑은 하늘에서 사람의 마음에 이식된 나무이다. 이 사랑은 신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 있고 우리 자아 속에 있지 않다.”

 

에드워즈는 사랑의 원천을 묘사하는 데 기억에 남을 이미지를 제시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있는 사랑은 하늘에서 사람의 마음에 이식된 나무와 같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성령이 주시는 선물로서, 이것을 받은 신자는 자기 목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신자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큰 유익을 끼치게 된다. 에드워즈는 신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심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어놓게 한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왕국의 진보를 위해 자기의 사사로운 세속적 이익에서 손을 떼고 전적으로 그리고 결연히 포기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이런 심령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경우에 이웃들에게 유익을 위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포기하고 내놓는다. 그리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이웃들의 더 큰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더 작은 이익을 기꺼이 내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기꺼이 버린다(요일3:16)”

 

애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본질과 능력을 감동적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적인 사랑은 세상적인 모든 사랑을 초월하고, 이기적인 정신에 반대된다. 도덕적인 사랑은 이기심과 반대되나, 이기적인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도덕적 사랑도 자기 사랑의 원리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적인 사랑은 그 원천이 다른 곳에 있다. 신적인 사랑의 근원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따라서 신적인 사랑의 원천은 하늘에 있다. 신적인 사랑은 이 사랑이 나온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자아를 지향하지 않는다. 신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기뻐하되,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기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고 기뻐하되,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적인 사랑은 원수에게까지 마음을 쓴다. 이로 보건대, 기독교적인 사랑이 얼마나 기이하게 뛰어나며, 이기적인 정신에 전적으로 반대되는지 분명하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독특한 성격을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적인 사랑에 뿌리를 둔 타인 사랑으로 사랑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즉 좋은 삶은 이타적이고 겸손한 사고에 의해 움직여진다. 생래적인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매우 역설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신적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 예수님

 

행복과 좋은 삶에 대한 에드워즈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겪은 온갖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이유를 깨닫는데 도움을 준다. 예수님은 자주 큰 고난에 직면했지만 사람이 조금도 약화시킬 수 없는 만족을 소유하고 계셨다.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조차,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굳게 신뢰했고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갈보리의 고통을 인내하셨다(12:2). 물론 십자가 자체가 예수님에게 행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행복을 얻고 누렸다.

 

그리스도의 이런 모범은 행복이 단순히 감정적 상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뜩히 깨닫게 해준다. 행복은 감정이면서 동시에 헌신이고 외적인 환희와 내적인 만족 둘 다다. 기독교 신앙에는 가장 강렬하고 지속적인 기쁨이 실제로 존재한다. 기독교는 최선의 삶의 방식을 제공해 준다. 기독교는 가장 행복한 삶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 성경이 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독교는 최고의 생활 방식을 제시한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신앙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설교에서 신앙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만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갖는 것은 아주 큰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기독교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깊은 즐거움을 준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삶도 이 세상의 보상과 내세의 행복 둘 다를 약속하는 성경적인 믿음에서 비롯되는 삶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다.

 

신자들은 매우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신자들은 내세에서 큰 보상 즉 큰 기쁨을 받게 된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보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잘 순종하면 큰 보상이 있다(19:11). 신자들이 현재 받은 보상은 신자들이 가진 모든 고통과 견뎌야 할 모든 어려움을 대처하는 데 아주 큰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다가올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이런 보상을 맛볼 수 있게 해주신다. 이런 내세의 즐거움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있는 모든 즐거움과 부유함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참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과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 둘 다를 낳는다. 사실 가장 가난한 신자조차 가장 부유한 불신자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부요하다. 신자는 선한 삶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파괴하거나 망칠 수 없는 천국을 미리 맛보게 된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의 삶의 신적인 성격을 잘 조명해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이 땅에서 영혼에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된다는 사실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고통어려움을 겪지만, 이런 것들은 이내 지나가 버릴 것이고 교회는, 이 땅의 쾌락을 추구한 가장 부유한 사람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맛보는,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좋은 삶이 주는 행복

 

에드워즈의 글들을 통해 에드워즈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다. 초상화에서 전혀 웃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 이 사람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앙심을 품고, 기쁨을 짓누르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던 그런 류의 사람보다 훨씬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에드워즈가 이상적인 삶으로 지향했던 삶은 가장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이 삶은 죄악된 쾌락주의를 퉁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길을, 믿음으로 꾸준히 걸어가는 삶이다. 바로 이 삶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삶은 자신의 유익과 충돌하지 않는다. 이 삶은 하나님과 사람을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을 포함하고, 겸손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선한 삶은, 인간적 지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주목할 만한 역설을 담고 있다. 이 좋은 삶은 부담을 주고, 도전적이고, 깊이 헌신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평강을 맛볼 절호의 기회,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이 바로 이런 삶이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시급하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누리게 하려고 창조하셨다. 에드워즈가 설명한 성경적 진리를 접하는 우리에게 있어 최우선 과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기륵 원하신다는 진리를 손상시키는 온갖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을 조금씩 맛만 보라고 복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행복을 쏟아 부어 주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128, 32:36-41).

 

이것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환경과 상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8:31-39는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하나하나 모든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된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서 우리의 불행이 하니라 우리의 행복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이와 같은 새로운 방향 설정은, 침울하고 패배주의적인 삶의 방식에서 천국의 향기가 나는, 용감하고 도전적인, 기쁨의 존재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순종이 기쁨이다

 

에드워즈는 이 땅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들은, 본성적 또는 악한 욕망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장 지혜롭고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은 가장 좋고 이상적인 방식을 고안해 놓으셨다. 그 삶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 또는 항복하는 삶의 방식이다(12:13). 따라서 순종이 바로 기쁨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다(요일3).

 

온갖 좋은 것과 행복한 삶은 죄 속에서가 아니라 믿음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적인 갈망을 만족시키는 기독교, 감정이 이끄는 기독교를 경계해야 한다. 건강한 믿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요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심약한 기독교를 방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힘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행복을 넘치게 부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허다한 인물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세상의 유혹을 피하면서, 우리의 구세주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이생과 내세 모두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다(39-47, 1-7). 따라서 순종은 활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