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좋은 삶
창조를 하나님 중심적 시각에서 본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반사하여 드러낼 목적으로 인류를 창조하셨다. 인류는 이런 신적인 부르심을 실행함으로써 끝없는 행복과 다함없는 만족을 누리게끔 되어 있었다. 에드워즈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류가 행복해지도록 창조하셨고,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겨 순종했다면 천상의 행복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영원무궁토록 경험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풍성히 부여받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이런 가능성을 끝장내 버렸다(창3장).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가능성은 날아가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인류는 이제 거친 땅에 홀로 배회하게 되었다. 하늘에까지 솟아오르도록 계획되었던 사람이 바닥끝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즐거움과 기쁨을 반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람은 즐거움에 대한 어마어마한 용량,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그리고 타락의 결과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즐거움의 그릇은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비로소 올바른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와 기적 속에서 타락한 인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스캔들을 일으켜 망신을 당하고 실망을 안겨 준 지도자와 명사는 예전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몹시 힘들지만, 이와 달리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존재의 이유, 세상에서의 위상 그리고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 에드워즈의 ‘원죄론’과 ‘신앙감정론’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검토해 볼 것이다.
죄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
인류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행복한 삶과 이토록 멀리 떨러져 안타까운 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죄의 본질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죄는 말은 마음의 타고난, 죄된 부패성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원죄는 악한 행위로 발현되는 근본 마음의 성향이다. 성경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의 타고난 죄악성과 죄책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모든 인류에게는, 적어도 도덕적 행위자로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죄책이 있다는 것에 대해, 성경에는 가장 분명한, 풍부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왕상8:46),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9:2),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만 아니라 크고 여러 가지 죄악을 범했다.”
죄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핵심을 요약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는 아무도 의로울 수 없다. 오히려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체질, 능력, 환경, 풍습, 견해, 교육, 나라, 기후, 민족과 시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발생한 모든 강력한 변화와 혁명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다.”
에드워즈는 죄가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이고 죄는 사람의 마음에서 직접 기인한 것임을 먼저 분명히 하는 방법론을 사용했다. 죄가 내적인 부패가 아니라 외적인 행동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이 노샘프턴의 신학자는,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죄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성경이 죄에 대한 책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에드워즈 당시에 인기가 없었던 이 가르침은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사와 개인적인 상황들을 잠깐 흘낏만 봐도 에드워즈의 말이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죄의 본질: 하나님께 대한 반항
에드워즈는 죄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마땅한 존경과 순종을 드리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본질상 매우 극악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죄의 극악함은 우리가 신적 존재에 드려야 하는 존경의 의무에 비례해 커져야 하고, 죄의 극악함은 하나님이 얼마나 존경받아 마땅하신가에 비례해 커져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보다 무한히 더 존경받으셔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존경이나 순종의 가치는 무한하지 못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를 존경하는 것에 어떤 공로가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존재에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의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갚아야 하는 빚을 지불하는 것에는, 그리고 가장 높은 의무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에는 아무런 공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불하기를 거부하는 데는 더욱 큰 죄가 있다.”
이 에드워즈의 주장은, 하나님 목전에서조차 사람의 선행이 죄를 상쇄히키고 더 나아가 선행의 공로가 죄책과 죄과를 능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는다. 하나님은 유한한 존경이 아니라 ‘무한히’ 존경받으셔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도 무한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의의 빚을 갚는 데 미흡할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의무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을 대개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우리 최선의 노력조차 하나님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에드워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의무뿐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관심과 존경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탁월하시기 때문에 무한히 사랑 받으실 만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바로 이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체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 외의 다른 유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인간 죄의 부패성을 완전히 폭로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는다. 마땅히 존경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도 맞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죄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배로 충만해지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한 사랑과 경배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여기에 바로 사악함이 있고 죄악의 반역이 있다. 더 못한 것을 사랑하고 더 못한 삶을 살기로 선택함으로서, 슬픔과 죽음에 자기 몸을 맡겨 버렸다.
하위 원리와 상위 원리
사람은 왜 이 못한 삶을 선택하고 지옥으로 향하는 길로 돌진했고 돌진하는가? 어째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따르고 사탄을 멀리할 충분한 이유가 넘쳤는데도 불구하고 반역하는 쪽을 선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했다. 이 답변은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세상 불행의 궁극적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두 가지 다른 ‘원리’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하위’(열등한)- 사람의 ‘자연적 욕구와 정념’을 포함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원리고, 두 번째는 ‘상위’(고등한)-‘신령하고, 거룩하고, 신적인’-원리다. ‘원죄론’의 설명이다.
”사람에게 있어 다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 만드셨을 때, 사람 안에 두 가지 원리를 심어 놓으셨다. 먼저 하위 원리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본성의 원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적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원리에는 자기 사랑과 함께, 인간 본성에 속하는 자연적인 욕구와 정념이 포함된다. 자신의 자유, 명예 그리고 즐거움에 대한 사랑이 이 원리에 속한다. 하위 원리 홀로, 하위 원리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둔 상태를 성경은 가끔씩 ‘육신’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원리는 상위 원리다. 이것은 신령하고, 거룩하고, 신적인 원리로서, 신적인 사랑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적 형상과 인간의 의와 참된 거룩함이 이 원리에 속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신성한 성품’(벧후1:4)이라고 부른다.“
타락의 결과
하위 원리가 상위 원리 또는 초자연적인 원리를 능가했을 때, 육신이 영을 앞질렀을 때, 타락이 일어났다.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마음을 절대적으로 통치하도록 주어진 것이 바로 이 상위 원리였다. 하위 원리는 상위 원리에 전적으로 종속적이며 복종하도록 주어졌다. 따라서 상위 원리는 통치하고 하위 원리는 복종하는 상태가 계속 되었더라면, 만사가 탁월한 질서, 평화 그리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적절하고 완전한 상태를 유지했을 것이다. 신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동안에는 품위, 생명, 행복이 있었고 인간 본성에 영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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