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주일설교
본문: 왕상 2:1-4
제목: 형통하는 길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였다.
세 가지를 명령한다. 유언이다.
자기 인생의 결론을 말한 것이다.
그 세 명령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하는 비결이다.
왕위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비결이다.
우리 인생의 형통도, 자손들의 왕권의 축복도, 이 세 명령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
1. 힘써 대장부가 되라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장부’는 남자를 뜻하고 여기에 ‘대’자를 붙여 남자 중의 남자를 강조한 것이다.
대장부는 어떤 일에도 울지 말아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맹자는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 뜻을 이룬 후에는
교만하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대장부라 한다.
성경에서의 대장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실상으로는, 사도와 선지자들, 히 11장의 믿음의 전당에 오른 영웅들,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다.
역사적으로는. 초대교회 교인들, 개혁자와 청교도들이 대장부라 할 수 있다.
패커는 청교도들을 가리켜 키가 100M가 넘는 삼나무와 같은 ‘영적 거인들’이라고 한다.
존스는 청교도들을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알프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 한다.
세상은 철옹성에 사는 거인들, 골리앗 같은 신체적으로 거대한 자를 대장부라 할 것이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권력을 쥔 자, 부자들, 저명 인사들을 대장부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영원한 것들을 알지 못하는 이 세대는 그럴 수 밖에 없다.
지금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그러한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는 사람,
모세의 율법애 기록된 대로 지키는 사람 곧 그러한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다.
사람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사람,
그러한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한 대장부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고 약속하고 강조한다.
대장부가 아닌 졸장부들은 세상 풍속을 따르고 이 세대를 본받고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주의 일을 모르고 자기 일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죄를 짓는 데는 대장부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졸장부였던
어거스틴을 대장부로 만들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로마서 13장 마지막 네 절 말씀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그리스도 안에서 대장부가 될려면, 때의 변화, 심령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음을 알고,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음을 알고,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길로 가야 한다.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는 지나간 때로 족하고,
육체의 남은 때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고
이제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더 이상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변화가 전혀 없고 어둠의 일에 여전히 젖어 있다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그는 졸장부요 그 앞 길이 뻔하고 멸망과 심판이 곧 닥칠 것이다.
빛의 갑옷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 못하면, 결코 대장부가 될 수 없다.
2. 기록된 대로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3)
대장부가 되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역으로 이렇게 하지 못하면 대장부가 될 수 없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기를 원하면서도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지킬 줄을 모른다.
교회 다닌다면서도 세상 방법으로 형통할려고만 하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형통할려고는 언감생심(어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일 정도이다.
시편 일편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고,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도 같다.
복 있는 사람은 성경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3)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성경을 멀리하고 세상 일만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형통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다.
말씀 공부에 시간을 바치면 마치 무슨 큰 일이나 당할 것처럼 질색팔색(꺼리며 놀람)들을 한다.
헤브론에 오른 사람, 헤브론에서 왕이 된 사람, 다윗은 한 마디로 말씀의 사람이었다.
왕위를 물려준 솔로몬에게도 죽으면서 유언으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지켜 행하라고 하고 있다.
그 길만이 오직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사가 형통하는 길이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다윗의 이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말년에 가서 돌이킬 수 없는 불순종을 한다.
처음에는 사울도 곧잘 했다. 문제는 왕이 되어 권력 맛에 부자 맛에 음란의 맛에 들면서
뿌리가 깊지 못한 믿음과 연단 받지 못한 마음은 무뎌지고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솔로몬은 많은 여자들(후궁 7백, 첩 300)을 두고, 여인들을 더 사랑하여 우상들을 만들어주고
산당까지 세워주었다. 그 여자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
그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두 번이나 친히 나타나셔서 경고하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
그에 대한 징벌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왕국은 둘로 쪼개져서, 열 지파는 떨어져 나가고, 겨우 한 지파만 등불로 유지하게 된다.
그것도 생전에는 사울처럼 벌하지 않으시라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영원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려면, 이 새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말씀을 통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지혜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서는,
우선은 되는 것 같다가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개의 시간이 무위로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시고 하늘로부터 진노가 임한다.
옛날에는 우상을 만들어 섬겼지만, 지금은 마음 속에 모신 우상이 더 무섭다.
황금만능을 믿는 돈신, 일신, 자식신, 가정신, 배우자신, 사람신, 조상신이 무섭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을 멀리하고 말씀 공부를 멀리하는 사람들은 그런 우상들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가는 길을 바꿀 자극이나 계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멀리하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고 복을 멀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고도 없이 닥치는 죽음이나 질병이나 사고 앞에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때는 늦으리이다.
결국은 그 앞에 서야 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전혀 돌이킬 길이 없다.
지금 들려주는 말씀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바란다.
3.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행하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2:4)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솔로몬에게 옮기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식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공의와 정의가, 그것을 허락하질 않으신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
그래야 왕위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과 유언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갈까요? 망하는 길로 갈까요?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못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영이 없고 육신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는 결코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가 없다.
지키더라도 겉으로만 지키는 외식일 뿐이고 기껏해야 바리새인의 의로 행할 뿐이다.
말씀은 우리 육신의 본성과 의지로는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말씀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들 심령 속에 말씀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은혜도 성령의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의 능력도 받지 못하면 말씀을 즐거워할 수도 지켜 행할 수도 없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자기 의와 자기 열심으로 더 지키고 행하는 것처럼 외식하고
말씀을 율법화하거나 세속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인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들만이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다.
성령이 없으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가 없다.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고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울 수 있을 뿐이다.
회칠한 무덤이 되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도 낙타는 삼키고 만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며 하나님을 헛되이 섬길 뿐이다.
둘째는,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이 안에 있더라도, 육신을 따라 살면 행할 수 없게 된다.
성령을 따라 영의 생각으로 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말씀을 살 수 없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육체의 소욕은 육신을 따라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거스르고 서로 대적하며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대적하고 거스르지 않도록 항상 유의하고
성령을 따라 영의 생각을 따라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이 성하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면 말씀을 겉으로만 지키게 된다.
결과는 죽은 것과 사는 것만큼 차이가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낳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낳는다.
대체로 열 받아서 평안이 없으면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산 것이더라구요.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생명과 평안이 온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4-26)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만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다.
우리는 매사에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할 때마다 내가 지금 영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지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지 점검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생명과 평안이 없다면 사망이 있을 것이고,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63:10)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주의 성령에게 반역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
그려면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신다.
자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되어 나를 치면 성령께서 친히 대적이 되어 치신 줄 알면 맞아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면,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었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새 마음 새 영,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받았다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말씀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고 천국과 축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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