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7 주일설교
본문: 눅 14:25-33
제목: 능히 내 제자
2020년 마지막 주일에 오늘 본문을 왜 주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시작은 끝을 가져오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지만 우리의 자세는 매번 새로워야 하고
새롭게 시작하여야 아름다운 끝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새로움, 원칙에의 충실이 없이는, 열매도 없다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의 충실 없이는 하드 파워의 축복도 기할 수 없다.
항상 우리는 더럽혀진 원칙을 다시 닦고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인 회심이 있어야 한다.
개혁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개혁은 또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은 원칙으로의 돌이킴이요, 원칙의 계속적인 적용이다.
사람들은 한번 개혁하고서는 그 떡을 누리기 바쁘다가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다.
교회는 유대교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계속적인 개혁, 끊임없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
말씀으로 성령으로 외에는 인간의 육체와 탐심으로는 이 개혁을 감당할 수 없다.
청교도 신앙이 절대 필요한 이유이고, 청교도 아카데미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다.
말씀으로 돌이켜야 하고, 성령의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은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여러분 생각에, 제자가 되지는 못해도, 구원은 받을 수 있을까요?
제자는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고, 구원만 받을래요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육체는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어도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이 그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광야에서 멸망 받았다는 말씀이, 겁만 준 걸까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면, 구원도 못 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자 수준과 구원의 수준이 다르다고 주님 말씀하신 적 없다.
구원 받은 자가 적으니이까? 물음에 주님 대답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도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도 적다고 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도 넓어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재물이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도 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신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되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 가족과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는 데 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구원의 문과 천국의 문을 한없이 넓혀 놓고 안심시키고 있다.
그 미혹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재의 교인들이 넘어가서 안심하고 있다.
1.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가 누구인가?
자기 가족이요 자기 가정 아닌가?
자기의 소속이요 혈연이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요 자기의 연장이다.
자기 목숨과도 연결되어 있는 관계요 접착되어 있다.
그런데, 주님은 서로 밀착되어 있는 이 가족 관계는 물론,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신다.
가정 중심 가족 중심 부부 중심 자녀 중심을 노래하는 상담학 심리학이 보면
기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할 일이다.
이 관계, 내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다른 것의 제자가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다른 것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한 공간을 다른 둘이 차지할 수 없는 것이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가족과 자기 목숨의 제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동시에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물리학적으로 너무도 당연한 이치를 왜 거부하고 놀라는가?
둘 다 갖고 싶은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재물도 하나님도 다 갖고 싶고, 세상의 것도 하나님 나라도 다 갖고 싶고, 자기 의도 하나님의 의도 다 갖고 싶고,
가족과 자기 목숨의 제자도, 주님의 제자도 다 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 움직이는 ‘마음의 자리’는 공간처럼 하나가 차지하면 다른 것은 들어갈 수가 없다.
둘 다 가질려고 하는 것은 이중인격이요,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돈과 재물을 사랑하고,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세상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탐한다.
사실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7)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에는 주님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자기 십자가에는 당연히 자기의 목숨이 달려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이 죽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의대로 살려고 할 것이니,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될 수가 없다. 자기의 제자가 될 뿐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17:33)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이 역설이 기독교이고, 참 신앙이고, 청교도 신앙이다.
청교도들은 1662년! 왕이 선포한 통일령에 서명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자기가 목회하던 교구와 사택과 월급을 다 포기하고 가족 전체와 길거리로 나 앉았다.
2천명의 ‘청교도’ 목사들은 자기 양심을 따라 그렇게 결단을 했고,
8천명의 ‘청교도주의’ 목사들은 서명을 하고 교구와 사택과 월급을 유지하고 가족과 잘 살았다.
지금도 자기 신앙 여정에 1662년이 없는 사람은 참된 청교도가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가 1662년의 원조임을 증언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구약 시대, 1662년의 원조는 아브라함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1,4)
모세도 그의 뒤를 잇는 1662년의 원조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요셉도 자기 가족을 떠나 자기 목숨까지도 위험한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다윗도 자기 가족을 떠나 적국에 망명생활하고 시글락 위기를 거치게 하셨다.
욥도 자기의 모든 것과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다 그물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려면 자기가 의지하고 소유하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주님은 통과하게 하신 다음, 능히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신다.
그 광대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고 간조한 땅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고난이 많고 극심한 것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 여정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면서 홍해로 광야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
소중한 관계와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는 과정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신다.
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많은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얻고,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 자는 잃게 하신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게 하신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된 자, 누구인가? 유대인들이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현대 교인들이요, 현대판 장로들, 유명 목사들, 신학교수들이다.
나중 된 자가 처음 된 자가 누구인가?
사도와 선지자들이요, 초대 교인들이요, 개혁자들이요 청교도들이다.
자기 인생 여정에 1662년이 없는 사람은 나중 된 자로서 처음이 되지 못한다.
청교도 아카데미에서 청교도 신앙을 공부할지라도
1662년이 없는 사람은 청교도의 삶을 살 수 없다. 청교도주의자만 될 뿐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33)
주님의 제자가 될려고 시작은 했다가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결말을 말씀하신다.
처음은 되었다가 나중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제자가 되겠다고 쉽게 나서지만 그 과정을 쉽게 보고 우습게 여기다가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고 보는 자가 다 비웃는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망대 하나 세우는 것도 자기가 가진 것으로 그 비용을 계산해 봐야 준공할 수 있다.
전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기까지 내가 가진 것으로 준공할 수 있는지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 비용 계산이 말씀 공부이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공부하고 본 받는 것이고,
그 비용 계산을 가장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청교도 신앙을 삶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1662년이 없는 사람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가볍게 듣지 말라.
‘너희 중의 누구든지’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는 것이다.
버릴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이다.
부분적으로 버리고, 흉내만 내어서는, 겉으로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세상 나라와 내 가족과 내 목숨을, 하나님 나라와 겸하여 살 수 없다.
둘 중의 하나이지, 이것도 저것도는 없다.
하나님은 이 훈련과 연단을 이미 우리 인생 과정에 하셨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다.
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성령의 지혜로 내 인생 과정들을 보고 해석하고 적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대로 “내 마음이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119:36)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고 보전하고자 하면 목숨을 잃게 되고,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고 죽고자 하면 살게 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 설교 녹음은 네이버 카페 '한가족교회 puritan church'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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