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 주일예배
본문: 마 22: 37-40
제목: 모든 성경의 강령
하나님의 말씀은 호렙산에서 십계명으로 요약하여 주셨다. 두 돌판으로 주셨다.
첫째 돌판이 하나님 사랑이요, 첫째 계명부터 4계명까지이다.
둘째 돌판이 이웃 사랑이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이다.
주님은 그 십계명을 다시, 크게 두 강령으로, 두 계명으로, 요약해 주셨다.
우리가 기억하기 좋고 지켜 행하기 좋게, 요약으로, 기준으로, 주신 것이 두 계명이다.
그리고 두 큰 계명의 관계를 ‘그와 같은 것으로’ 첫째와 둘째로 연관시켜 주셨다.
1.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
‘네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은 네 마음을 다 달라 하신다. 부분이나 겸하여서가 아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목숨도 다하고 뜻도 다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2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입으로만 가까이 하고 입술로만 공경할 뿐이다.
마음은 멀리 떠나 있다.
사람의 계명이 무엇인가?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사람의 철학이다.
그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입과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공경할 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성경이어야 하나님의 계명이다.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
네가 하나님을 보물로 여긴다면 네 마음도 거기 있다.
네가 돈과 재물을 보물로 여긴다면 네 마음도 거기 있는 것이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면,
마음이 육체와 하나가 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 풍조를 그대로 따르고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다.
마음은 육체와 하나가 아니라 성령과 말씀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대적하고 거스른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익을 따른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33:31)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길 뿐이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유행가 가수 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은 한결 같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심지가 견고한 사랑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심지(心志)는 마음 속에 품은 뜻이다.
하나님을 향한 심지가 견고해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 주신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어떠한 것인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보여 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다니엘이 이 조서에(어기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의 열전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나와 있다.
아벨, 노아, 에녹, 아브라함, 모세, 기생 라합,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8)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믿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로 믿는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심을 믿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지금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이 앞으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룰 것을 믿는다.
자기의 부모 처자식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 모든 복 영생을 얻는 길임을 모르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만을 육신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사랑한다.
사울은 마음을 다해 재물을 사랑하다,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사랑하다 버림을 당하였다.
한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되었기에,
아들을 서원대로 드렸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즐겁게 되었으며, 뿔이 높아졌으며, 원수들을 향해 입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함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인하여 경외함을 인정 받았다.
“네 아들 독자라도 네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2. 크고 둘째 되는 계명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하신다. 첫째 없이 둘째 없다.
첫째 없이 둘째 없고, 첫째 계명을 지키지 않고서는 둘째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첫째와 둘째의 연관에서 알 수 있다.
이웃 사랑 만인 사랑이 안 되는 근본 이유는 첫째 사랑, 곧 하나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그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다고 했다.
기도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요 구제는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항상 부족한 것이 이웃 사랑이요 구제이다.
기도와 구제가 보좌에 상달되어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 그와 그의 집을 구원하셨다.
우리도 두 가지가 상달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웃 사랑으로 표출되지 않은 하나님 사랑은 입술만의 사랑, 공경일 가능성이 높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한 사랑은 재물 사랑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 마음을 다한 그리스도 사랑이 없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모든 중요한 인간 관계, 부부간, 부모 자식간, 주종간에 피차 복종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경외할려면 우리 육체와 마음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순서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도,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으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겉으로 흉내만 낼 뿐이다.
내 마음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형식적이 될 뿐이다.
재물 사랑 돈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차 있는데,
어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 비워질 때, 채워질 때,
비로소 이웃이 보이고 사랑하게 된다.
야고보 사도는 경건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있다면,
정말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어려움 중에 돌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지 분별하는 시금석을 말씀해주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 둘이,
참다운 경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의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3. 이 두 계명이 모든 성경의 강령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강령은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 요약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세 율법과 모든 선지자의 글이다.
신약 성경이 완성이 된 지금에는 모든 성경을 말한다.
주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유언과 같은 명령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분부한 모든 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구약성경과, 승천 후 이루어진 신약성경, 모든 것이다.
모든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이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목사는 최우선적으로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계명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가르치면 절대 안 된다.
그것은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입술로만 공경하고 마음은 멀게 하는 것이다.
주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과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처럼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 성경을 가르침 받아 지켜 행해야 한다.
지금 과연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고 있는지,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참된 예배인지 가르침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선지자가 거짓을 설교하고 제사장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고 있는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다가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이 땅에 있도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하시는데 말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나 지금이나, 교회와 내 백성들이 얼마나 분별력이 없고,
무지몽매하고, 마이동풍 우이독경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이켜야 한다.
왜 그러느냐? 도대체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도대체 성경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지 않고 성경을 매일 상고하지 않으면,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거짓 선지자들의 노예가 되고 멸망으로 인도되고 만다.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살후2:15)
그것이 주님의 명령,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순종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이 돌이켰고, 청교도들이 완성한 사도들의 가르침에로 돌아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청교도 신앙을 연구하고 본받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 사로잡힘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다.
초대교회는 첫째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였다. 우리도 가르침과 배움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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