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5권, 20장 균형 있는 훈육 (김영희)

강대식 2021. 3. 30. 21:50

20 장 균형 있는 훈육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1-4)

 

- 우리는 현대인에게 훈육의 필요성, 그것을 인식하도록 강조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사도는 그의 교훈을 두 항목, 즉 부정적(소극적)인 측면과 긍정적(적극적) 측면으로 나누었다.

 

- 부정적(소극적) 측면

-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 그것은 우리가 훈육을 시킬 때면 언제나 존재하는 위험이다. 만일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한다면 유익보다는 해를 더 하게 될 것이다. 아는 바와 같이 두 극단은 똑같이 그릇될 것이며 우리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5:18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언제나 열쇠가 되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다룰 때 성령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삶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능력”, “자제두 가지임을 알았다. 절제 있는 능력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자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라고 하였다. 자제할 수 없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제되는 능력, 즉 절제이다.

 

1. 훈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

1) 첫 번째 원리는, 우리가 먼저 자신을 조절하거나 절제하지 않는 한 진정한 훈육을 행사할 수 없다. 술 취한자는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능과 정욕과 저속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충만해 있어야 한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자제력이 특징이다. 여러분은 훈육할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자신이 훈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무슨 권리로 자녀들에게 말하겠는가? 자제력, 기질을 조절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결 조건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무리 화가 북받치더라도 술 취한 자와 같이 격동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절제와 자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원리는, 변덕스러워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원리에서 나온다.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화나는 것은 부모의 행동과 기분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이 심하고 일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술 취한조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 부모는 참 도움을 주는 훈련을 시킬 수 없고, 아이는 화와 분노로 인해서 부모에 대한 존중심이 없어진다.

부모의 행실에 일관성이 없을 때 훈육은 제대로 될 수 없다. 남의 행동을 보고 반응을 나타낼 때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부모는 생활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원리는, 부모들은 결코 아이들의 이유를 듣는 것을 싫어하거나 비합리적이어서는 안 된다. 훈육을 받는 입장에서는 전반적인 진행과정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은 없다. 물론 아이들이 이것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비합리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게 하라. 만일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아이가 저지른 특별히 잘못된 행동뿐 아니라, 그 잘못된 이유에 대해서도 징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아예 들어보지도 않거나 말대꾸를 금하게 되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자녀들로 하여금 반발과 적대감을 일으키도록 한다.

 

4) 네 번째 원리는, 부모들은 결코 자기중심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이 부모들의 이기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가끔 일어난다. 아이들도 자기 자신의 삶과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자기들의 노리갯감으로만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다. 부모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작은 생명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들의 인격을 묵살한다. 그런 유의 부모들은 아이에게서 모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이는 잔인한 태도이며, 이러한 태도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성년이 된 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 그런 부모들에 의해서 자기들의 삶이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따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것이 금지 되었다. 그것이 훈육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폭군이요, 그것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과 상반되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고래는 자신밖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다. 만일 다른 이들을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술 취하지 않을 것이다. 술 취함은 이기주의의 표이다. 특별히 부모들과 자녀들의 미묘한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5) 다섯 번째 원리는, 벌을 주는 것, 버릇을 고치는 것 훈육은 결코 기계적인 방식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경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특무상사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바르고 참된 방식으로 훈육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고 분명해야 한다. 단추를 누르고 기계를 작동하는 것 같은 결과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계에나 속할 것이다. 참된 훈육은 언제나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6) 여섯 번째 원리는, 훈육은 결코 너무 혹독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훌륭한 많은 부모들이 직면한 위험은 그들 주위에 있는 무 율법을 보고 그것에 대해 탄식할 때 너무 혹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반대가 잔인이 아니라 균형 있는 훈육, 자제력을 갖춘 훈육이다.

만일 부여된 형벌이 잘못한 것에 비례하지 않을 때 그 형벌이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벌 받는 자에게 공정치 못하다는 느낌을 주게 되고 결국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노여움을 조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벌을 주거나 꾸지람을 주거나 버릇을 고쳐 줄 때 아이에게 굴욕감을 준다면 부모 자신이 훈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해에 합당한 벌을 내리라. 자녀가 생각하기를 난 무시당하고 있다거나 완전히 굴욕당하고 있다거나 또는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벌을 주지 말라.

 

만일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 있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건전한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아이의 버릇을 고쳐 주는 것이 결코 우리 자신의 느낌에 만족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결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개인의 인격이나 삶을 모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노엽게 하고 그들이 반역자가 되도록 충동질하고 있는 셈이 된다.

 

7) 일곱 번째 원리는, 우리는 결코 자녀들의 성장과 발전을 눈치채지 못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성장해도 유아시절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부모들이 있다. 아이들의 지식과 체험이 넓어지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점은 특별히 자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게 될 때 중요하다. 이 사춘기는 우리 모두가 지나야 했던 가장 험난한 시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기는 특별한 은총과 이해와 가장 주의 깊게 대처함을 요구한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고 큰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법칙은 우리가 결코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의 관점을 주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뿐더러 신약의 중생원리에 대한 이해가 말할 수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점은 다른 영역에서도 해당된다. 자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남편이나 아내, 어머니나 자녀)이 왜 그렇게 되지 못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그들의 전반적인 경향은 참을 수 없을 정도에까지 그들로 하여금 강제로 신앙으로 들어가게 하고, 자기들의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서는 신앙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우리의 할 일이란 그들을 얻으려고 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의 됨됨이가 탁월한 것과 그럴듯한 면을 보여주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 대해 인내하고 그들의 난관을 참아내야 한다. 그의 입장에 서서 진정한 동정심과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의 노력을 거절하고 거부한다면 노하지 말라. 그들에게 너희가 가장 값진 것을 잃고 있어 슬프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최선을 다해 그들과의 담을 헐어 버리려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고지식함으로 딱딱하게 대하거나 이유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거절해 버리는 식으로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그들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선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2. 요약

1) 훈육이란 어제나 사랑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일을 하려 덤비지 말라. 먼저 자기 자신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를 말하라. 그러나 사랑 가운데서이다. 훈육은 사랑에 의해서 조정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훈육의 목적은 여러분의 표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유익이 여러분의 지배적인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권한은 자녀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맡겨진 것이고 우리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자녀는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완전체이며, 여러분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볼 때 먼저 영혼을 보아야 한다. 자녀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한 영혼이다. 여러분은 그의 보호자와 관리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2) 훈육은 언제나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존경하기에 이를 그런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자녀들은 때로는 자신들이 벌을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자녀들은 항상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 있다면 그들을 훈육한 효과는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하고 싶을 때조차도 부모님 말씀이 옳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 자신에게 하는 훈육과 절제를 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하는 것이 화나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사랑하고 이 죄악의 세상에서 잘되고 유익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알게 될 것이다.

 

- 많은 이들이 거의 부모의 권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녀들을 한갓 귀찮은 존재나 한때의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혹독한 벌을 내리거나 방치한다. 아이들에게는 아주 적은 관심밖에 두지 않는다. 고통이나 감수성이 강한 아이의 본성에 찾아오는 두려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의 비극은 그러한 사람들이 신약성경의 교훈에 따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에 충만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써 대하듯이 자녀들에게 대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악을 참으시는 그 놀라움이여!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내게 있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처럼 놀라운 일이 없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같은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있게 하여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게 하라. 우리의 실수로 인해 자녀들과 우리 자신들을 모든 악함으로 휘말려 들게 하지 말라.